한줄 詩

유적지 혹은 유형지 - 유병록

마루안 2018. 5. 16. 21:55



유적지 혹은 유형지 - 유병록



수십기 고분이
푸른 왕관처럼 펼쳐진 유적지에서
종이 금관을 쓴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누구나 왕을 꿈꾸었으며
실제로 누군가는 왕으로 죽었지


무덤 안쪽
십수세기 전의 죽음을 들여다본다
왕이시여
많은 자는 살아서도 이만한 집을 가진 적이 없나이다
이 많은 방문객을 맞은 적이 없나이다


그러나 비애의 빗금이 비켜가는 금관이란 없다
한때 슬픔으로 빛났으며
고통이 오래도록 머물렀을 금관
왕은 죽어서도 벗지 못한다
금관이 왕을 내려놓을 뿐


밖으로 나오자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 표지를 무시하고
고분 위로 올라간 아이가
환하게 웃으며 미끄러져 내려온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금관을 머리에 쓴 어린 왕처럼



*시집, 목숨이 두근거릴 때마다, 창비








밀고 간다 - 유병록



창궐한 부재가 밖을 내다본다 의자에 앉아 네가 나타나는 꿈을 꾸다 깨어난다


시간은 바닥날 기미가 없지만
정적은 부재에게도 무겁다


곧 올 거야
밤이 저문 뒤에 여름이 오고 오후가 사라진 후에 눈이 오듯이
돌아올 거야


부재가 창문을 연다
가구에 쌓인 먼지를 닦고 바닥을 쓸어내지만
너는 오지 않고
부재는 눌변이 되고 말더듬이가 되고 마침내 침묵이 되고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그만큼 가까워진 거야


사라진 네가 사라지지 않는 그 집에서
초로(初老)의 부재는 아직 기다리고


시간은 간다
너의 침묵이 밀고 간다 너의 부재가 밀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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