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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그렇게 완성되리라 - 권순학

삶은 그렇게 완성되리라 - 권순학 아직 청춘이지만 퍽 소리 한번 질러본 적 없는 화장 한번 한 적 없는 그러나 어처구니없이 가려는 이를 위해 떠나보내는 자들이 흔들리지 말라고 잊지 말자고 눈물 젖은 꽃으로 약속을 한다 술은 적이고 동지지만 제사 술은 술이 아니라며 함께 제를 지내자던 이를 위해 잔을 올린다 부고보다 더 빨리 달려온 부슬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남은 체온으로 불 당겨지고 시간은 굽어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 삶은 그렇게 완성되리라 *시집/ 너의 안녕부터 묻는다/ 문학의전당 이명(耳鳴) - 권순학 자물쇠 하나 고장이 났다 종종 찾아오는 이명(耳鳴) 새가 집을 지었나 보다 새의 전생은 분명 나무였을 게다 뿌리박고 오르다 더 오르지 못하던 어느 날 날기를 결심하였을 때 솟지 않는 용기를 굴뚝에 부추겼..

한줄 詩 2022.03.16

인간으로 사는 일은 하나의 문제입니다 - 김영민

얼마 전에 끝난 대선 결과에 실망한 나머지 한 며칠 가능한 정치 뉴스를 멀리했다. 이런 걸 멘붕이라고 하던가. 그래도 워낙 넘어졌다 일어서는데 단련이 잘 되어 있기에 금방 추스리고 이 책을 읽었다. 누군 나이 먹으면 보수적으로 변한다는데 나는 거꾸로다. 확실히 나는 돌연변이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나 DNA 자체가 절대 보수는 될 수 없게 설정되었지 싶다. 그러면서 점점 정치적 인간이 되어간다. 차일피일 미뤘던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부제가 이다. 저자 김영민은 다재다능한 학자다. 평소 끊임없는 공부를 한 탓에 다방면에 정치적인 숨결을 불어 넣는 글을 쓴다. 이 책에도 전방위적인 분야를 오가며 독자가 정치적 동물임을 깨닫게 한다. 책, 영화, 미술, 사진 등 저자가 접했던 독서량으로 인한 지식에서 자신..

네줄 冊 2022.03.16

무허가 건축 - 최백규

무허가 건축 - 최백규 우리는 그저 혈관 아래 불을 지피는 개들이었다 지하상가 라디에이터 앞에서 피 묻은 손바닥을 덥히며 재미있었다고 그래도 다시는 못하겠다 같은 말이나 흘리다가 웃을 날이 번질 테지만 아직 불발인 폭죽에 계속해서 성냥만 긋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이해하니까 아무도 소리를 지르지 않고 욕설조차 없이 떠나버려도 녹슨 세면대처럼 여기에 있다 개의 이빨로 얼음을 깨무는 순간을 기다리면서 매일 하나씩 악몽들 적어 선물하면 언젠가 눈빛이 조금 더 사나워져 있을까 관에 들어가 묶이는 건 포토 부스 안처럼 뻣뻣하고 어색할까 막연하게 그려보는 너의 노년은 언제나 혼자여서 어디서부터 놓아주어야 할지 따위의 생각만 잔뜩 했다 턱을 괸 염색이 제대로 먹지 않아 슬픈 너와 손을 잡으..

한줄 詩 2022.03.15

볼륨 - 김승종

볼륨 - 김승종 몰래 화장하고 부드럽게 떼를 써도 삶은 한정된 볼륨 누구나 위대한 말씀 따라 레버를 올리기도 내리기도 하지만 익숙해져 풀 죽었다가 이마저 낯설어져 또 꿈꾸려 하고 흰 머리칼 버리기를 우리는 꺼리는지 몰라 오늘은 볼륨을 올리지도 내리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그대로 들으며 만취한 꿈속 쓸쓸한 루주 칠한 몸 깨워 자기 앞의 삶 그 시작과 끝을 이제 한번 노닐어 보자 사라져 가네 뭉클한 것 화살인가 활인가 과녁인가 아니라면 그게 무엇인가 우리인가 볼륨을 높이고 숨겨 둔 춤을 춰 보아야 하나 소식 준 옛 친구여 그대 오늘은 유죄다 그것을 알아내기를 오토산(五土山)을 그리워하는 견자(見者)들에게 먼저 알리고 우리 젊은 날에도 회수(回首)의 편지를 쓰기를 구태여 그 끝에 '이제 안녕히'라고 쓰든 말든..

한줄 詩 2022.03.15

대산문화 2022년 봄호, 발견 시

희망을 내포하고 막바지로 치닫는 중일까. 코로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중에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꽃이 피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남쪽에는 매화가 피기 시작한 모양이다. 대산문화 봄호에서 눈에 띄는 시를 발견한다. 좋은 시는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눈과 가슴에 스며들기 마련이다. 이런 걸 공감이라고 하던가. 잊힐세라 필사를 시도한다. 한 자씩 누를 때마다 이 시가 더욱 가슴에 박힌다. 행간은 물론이고 助詞 하나까지 버릴 게 없다. 여운이 오래 남는 시다. 탑신에 내리는 눈 - 기혁 촛불이 내부의 어둠을 태워 불을 밝힌다고 속단했으나 나의 무게는 이내 돌멩이의 내면에 부딪치고 말았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던 인연들이 단 한 번 발길질로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은 스스로 열린 적 없는 암석의 외부가 아니라 수천 년 풍화로..

여덟 通 2022.03.14

공중에 새들이 가득한 날 - 박지영

공중에 새들이 가득한 날 - 박지영 지친 노동에 하루 치가 뭉그러진 곳에는 당신이 있습니다. 맨드라미, 민들레, 나비, 종달새에 이르기까지 햇빛 쨍한 날 찾아가는 친정집 향한 풀섶 위에 발등을 가르는 바람 소리로 솔깃하던 당신, 태풍 소식에 대목장도 서럽고 동동거리는 마음에 빈궁한 장바구니를 뒤로 감추며 남은 아이 둘 데리고 도끼비시장을 배회하다 보면 도래지를 잃은 도래지를 잃은 날갯짓이 공중에 가득합니다 *시집/ 돼지고물상 집 큰딸/ 실천문학사 아버지의 하루 - 박지영 마지막 넝마주이가 집을 나서면 그 시끄럽던 마당도 30촉 전구 하나만 흐릿하게 남는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낮에 들어온 이웃집 송사의 무임 대소서 일을 시작했다 불 끄라는 엄마의 통박에 아버지가 하시던 말은 '이거라도 해야 우리 먹고사는 일..

한줄 詩 2022.03.14

셋 중 하나 - 이현승

셋 중 하나 - 이현승 세상에 부모는 세 종류뿐이다. 서툰 부모, 어리석은 부모, 나쁜 부모. 팔이 부러진 신(神)은 놀라서 울고, 아프고, 잠들고, 소스라친다. 아픔을 보는 것만으로 몇 배는 더 아플 수 있지만 결국 대신 아플 수는 없으며 할 수 있는 것이 기도밖에 없는 사람들이란 자기를 책망하고 힐난하는 것밖에 없다. 불행을 믿고, 불안에 의지하며, 행운을 간구할 수밖에 없는 쓸쓸한 신앙인일 수밖에 없다. 팔에 붕대를 감은 신은 깨어나 롤리팝을 핥으며 세상을 다 가진 미소로 화답하기까지는. *시집/ 대답이고 부탁인 말/ 문학동네 죄인 - 이현승 회귀란 너무 멀리 떠나왔다고 자각한 자의 것일까 회심은 늘 그 자리에서 멈춘다. 돌아갈 수 없는 자에게 떠나온 자리는 책망의 자리다. 건물을 통째로 집어삼킨 ..

한줄 詩 2022.03.14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 최백규 시집

모처럼 혼신을 다해 빨려들어가 읽은 시집 하나를 만났다. 일단 라는 서정성 짙은 제목부터 마음에 든다. 아마도 제목으로나 작품성으로도 당분간 이만한 시집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래 회자될 시집은 제목부터 먼저 뇌리에 확 박혀야 한다. 시 내용 또한 서른 살의 시인이 맞는가 싶게 밀도가 있어서 여백에서마저 긴 여운이 남는다. 耳順의 시를 쓰는 서른 살이랄까. 독자를 빨아 들이며 계속 읽게 만드는 힘은 이 시인의 탁월한 능력이다. 시집이 나온 게 올 초인데 의도된 오타인가. 단 한 줄의 시인의 말 끝에 2022년 여름에 시집을 냈단다. 가까운 미래다. 첫 시집인데 할 말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짧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런 시인의 말 또한 깊은 공감이 간다. 이래저래 괜찮은 시인 하나 가슴에 담..

네줄 冊 2022.03.13

저 공장의 불빛 - 이우근

저 공장의 불빛 - 이우근 노동이 제물(祭物)이지는 않다 신성(神聖) 하다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걸레 삶은 물로 밥해 먹는 그 인격은 천혜(天惠)의 신분에 반비례 남의 짧은 길, 나는 왜 돌고 돌아가는 지 도생(圖生)의 결과물로 몇 푼 봉급, 훌륭했지, 부끄럽지 않으이 내 한 몸 희생하면 즐거운 나날 훈장이 아니었지만 정말 훈장이었지 잘, 더럽게, 질기게, 살았다고, 삶의 명세서를 나의 코밑으로 드민다. 그러나, 가령, 그렇더라도 불빛으로 위장을 해선 안 된다 불빛으로 위장되어서도 안 된다 생산은 있어도 자위로는 안 된다 소모품으론 더 이상 안 된다 밥 먹기 위해 땅을 다지는 날들 좀 서러운 날들의 연속 어쩌나, 도시락으로 챙김, 그래도 가야 하니, 참 먼 길.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

한줄 詩 2022.03.13

양철지붕에 비 긋는 소리 - 장시우

양철지붕에 비 긋는 소리 - 장시우 따뜻한 그늘이 보이지 않는 오늘은 비 내리는 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계절, 양철지붕에 비 긋는 소리 듣는 낯익은 듯 낯선 저녁 귀 기울이다 익숙해진 소리들 사이 벽을 넘어온 보일러 소리가 방을 흔든다 혈관에 피가 도는 소리 같은 거 기척을 보낸다는 것 살아 있다는 고백 같은 것 잠잠해진 가습기를 건드린다 기다렸다는 듯 물방울을 뿜는다 너도 살아 있구나 라디오 전원을 넣고 볼륨을 올린다 어댑터와 규칙적이거나 불규칙하게 엉킨 전선을 타고 사람이 오고 음악이 흐르고 숨어 있던 소리들 쏟아진다 라디오 속에 살던 사람들이 궁금했던 때가 있었다 그 사람들, 어느 과거에서 둥둥 떠다니겠지 딸!깍! 전등을 켜자 눈을 뜨는 방 어느 선을 타고 건너온 걸까 저 빛은, 허공을 떠다니는..

한줄 詩 2022.0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