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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가노니 - 허형만

이제 가노니 - 허형만 이제 가노니 본시 온 적도 없었듯 티끌 한 점마저 말끔히 지우며 그냥 가노니 그동안의 햇살과 그동안의 산빛과 그동안의 온갖 소리들이 얼마나 큰 신비로움었는지 이제 가노니 신비로움도 본시 한바탕 바람인 듯 그냥 가노니 나로 인해 눈물 흘렸느냐 나로 인해 가슴이 아팠느냐 나로 인해 먼 길 떠돌았느냐 참으로 무거운 인연줄이었던 것을 이제 가노니 허허청청 수월(水月)의 뒷모습처럼 그냥 가노니 *시집/ 있으라 하신 자리에/ 문예바다 뒷굽 - 허형만 구두 뒷굽이 닳아 그믐달처럼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수선집 주인이 뒷굽을 뜯어내며 참 오래도 신으셨네요 하는 말이 참 오래도 사시네요 하는 말로 들렸다가 참 오래도 기울어지셨네요 하는 말로 바뀌어 들렸다 수선집 주인이 좌빨이네요 할까 봐 겁났고 우빨..

한줄 詩 2022.04.01

문득 뿔은 초식동물의 것이라는 생각 - 이현승

문득 뿔은 초식동물의 것이라는 생각 - 이현승 집도의가, 환자분 얼마나 아프세요? 일부터 십 중에 몇인지 말해보세요, 물을 때 이 악물고 뒹구는 사람의 고통이 십, 십, 아니 백이라도 결국 십을 찍으면 구나 팔로 향하게 마련이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을 생각할 때에는 뽑혀나간 뿔을 더듬는 심정으로 도대체 산 채로 제 뿔을 빼앗긴 심정은 어떨 것인가. 종종 우리가 마취제를 맞고서 훌쩍 다녀온 저 십의 세계란 한도를 초과하여 계측 불가능한 슬픔 같은 것은 아닌가. 그때는 딱 죽을 것만 같았지만 제법 살 만해졌다고 생각될 때, 그때 문득 다시 아프다. 아픈 건 늘상 처음 같은데 견딜 만하다는 건 처음만큼은 아니라는 거. 남보다 더 아파본 사람이 충고라도 한다. 꼭 십까지 가봐야 구나 팔에게 충고하는 건 아니다...

한줄 詩 2022.04.01

발라드풍으로 - 한명희

발라드풍으로 - 한명희 -지천명을 등에 업고 몸 여기저기 불다 만 풍선처럼 물집이 나 있다 눈 부릅뜨고 봐도 알 수 없는 세상을 위하여 시를 쓰던 당신은 모래밭에 집을 짓고 나는 발라드풍으로 노래를 한다 커피숍 한쪽 구석에서 너무도 자주 네 꿈을 꾸었기에 그때는 밤이었지요 말라비틀어진 나무에도 연분홍 꽃이 피는 아침 집채만 한 파도쳐 잠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방파제 또는 열기구, 가슴속에 불을 지피던 여자를 찾아가다 추락한 어느 섬 헤엄쳐 나올 불면의 바다였지요 누군가 미소 띤 얼굴이 보내는 한 잔의 따뜻한 질책과 초승달 같은 눈빛의 차가운 격려 속에 모래밭에 집을 짓고 알 수 없는 시나 쓰던 당신처럼 지천명을 등에 업고 견디는 하루는 파도쳐 쉽게 지치고 사막을 걷다 물집에 잡힌 몸은 기댈 곳이 필요..

한줄 詩 2022.04.01

미스김 라일락 - 김미옥

미스김 라일락 - 김미옥 삼월에서 사월 사이 집중적으로 아파요 지하상가 입구에서 전단 돌릴 때 이마에 꽂히는 햇빛들 겨드랑이에 두 손 넣은 채 마시는 녹작지근한 공기 무관심한 선배들 심부름에도 창밖은 환하게 빛나요 휴일이면 해동된 채 잠만 자요 일억 년 후 깨어났는데 구석기 여인이 되어 있다면 산뜻한데 우울한 기분이 이런 걸까 월급이 제일 적은 내게 경리계장은 십 원짜리까지 철두철미했고요 그 아저씨 도박으로 횡령사고 냈을 땐 내 심장이 더 쫄깃했어요 바람이 확 구부러졌다가 매섭게 감기는 날 개나리 한 아름 화병에 꽂아두고 쓸모없어진 단백질처럼 웃었어요 어릴 때 기억은 중국집 간판처럼 희미하지만 교문 앞 할머니가 팔던 병아리 죽기 살기로 울어대던 주둥이들은 잊히지 않아요 삼사일 못 견디고 기어이 죽어 버린..

한줄 詩 2022.03.31

흉한 꿈을 꾸다 깬 저녁 - 심재휘

흉한 꿈을 꾸다 깬 저녁 - 심재휘 마루에 오후의 봄볕을 깔고 그 위에 담요 한장을 더 깔고 엎드려 턱 괴고 바깥을 보면서 잠이 든 모양이다 흉한 꿈을 꾸다가 깨어보니 어느덧 몸이 식은 저녁 돌아가시기 전에 속이 안 좋던 아버지는 식은 밥을 뜨거운 물에 말아 드셨다 무엇을 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는 해 질 녘에는 내 등을 두툼하게 덮어주다가 기울다가 인사도 없이 떠난 햇살이 너무 멀고 흉한 꿈속의 사람은 노을 전 서편처럼 붉게 피었다 진다 삼월의 빈집은 겨울보다 더 추운 계절 동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왁자한 저녁에 차가워진 배를 문지르면 배는 이내 뜨신 물속의 식은 밥처럼 온기가 돌고 배 속 먼 곳은 손이 닿지 않아서 여전히 차고 자다 깬 저녁은 금세 어두워진다 *시집/ 그래요 그러니까 우리 강..

한줄 詩 2022.03.31

대서 즈음 - 강시현 시집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시도 그렇다. 서 말 아니라 백 말이라도 읽어주는 독자가 없으면 그건 한갓 이불 속에 혼자 숨어서 하는 자위 행위에 불과하다. 열 권의 시집을 냈는데도 그 시인에게 아무 궁금증이 없는 경우가 있는 반면 단 한 권의 시집에서 그 시인을 홀딱 벗겨 해부해보고 싶어질 때가 있다. 강시현 시인이 그렇다. 시를 읽으면서 어떤 사람일지 정체성이 궁금해지는 경우다. 이 시집은 두 번째 시집이다. 한 시인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권은 읽은 후라고 보는데 세 번째까지 갈 것 없이 제대로 빨려들었다. 이 시인은 첫 번째 시집부터 다소 두껍다. 두 권 다 거의 100여 편의 시가 실렸다. 그런데도 그의 시는 건너 뛰고 싶은 작품 하나 없이 지루하지가 않고 술술 읽힌다...

네줄 冊 2022.03.31

썰물 연구 계획 - 전대호

썰물 연구 계획 - 전대호 이쪽 바닷자락이 슬슬 쓸려나가는 걸 보면서, 수평선 너머 저쪽 자락을 어떤 거대한 손이 쓱 잡아당기는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지. 그러나 여섯 시간 후 이쪽 자락 도로 슬슬 밀려드는데, 거대한 손은커녕 바닷자락을 문 갈매기조차 안 보여 냉철하게 가설을 바꿨네. 수평선 근처 물밑에서 어떤 거대한 손이 거기 한가운데 자락을 엄지, 검지, 중지로 살짝 쥐고 아래로 끌어당겼다 위로 올렸다 하는 것이 틀림없어! 수평선 근처 바다는 늘 잔잔하여, 살짝 건드린 자리도 대번에 눈에 뛸 테니, 검증은 일도 아니리. 수평선 바로 위에서 저공비행으로 수평선을 넘나드는 사인곡선을 그리면서 거기 잔잔한 바다, 더없이 고요한 그 기하학적 평면을 샅샅이 살피자. 꼬집힌 자국이 틀림없이 보일 것이다. 잘 다린..

한줄 詩 2022.03.30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아프지 마, 라고 네가 말할 때 - 강문숙 한 사흘 대답 없던 톡에 깨알 숫자 사라지고 댓글 뜬다 주말엔 폰을 아예 책상 서랍에 넣고 지내 일찍 난로를 꺼 버린 탓에 감기가 왔나 봐 이제 난 좀 괜찮아졌지만 걱정했을 네가 더 걱정이야 너는 아프지 마 아프지 마, 라는 말 참 아프게 다정한 말 봄꽃 피려다가 꽃샘바람에 움츠러들 때 가는 입술 벌려 봄볕 받아먹고 있던 저 나뭇가지를 꺾어서 쓰는 말 어떤 색으로 피어날지 알면서도 난생 처음 본 색깔인 양 신기한 꽃잎 속 하얀 입김 같은 말 말에도 온도가 있어 느린 게이지 곡선으로 끌어올리다 노을 같은 발음으로 아프지 마, 네가 말할 때 아프다가도 나는 안 아프고 그래서 더 아프고 *시집/ 나비, 참을 수 없이 무거운/ 천년의시작 모로 눕다 - 강문숙 따스하게 ..

한줄 詩 2022.03.30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 박동훈

상위 1% 성적만 들어갈 수 있는 유명 자사고에 다니는 학생과 북한에서 내려온 수학자의 아름다운 만남과 화해를 그린 영화다. 어렵게 느껴지는 수학에 관한 영화인데도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자사고 기숙사에 머무는 한지우(김동휘)와 탈북자 수위인 이학성(최민식)은 처음 악연으로 만난다. 가난한 홀어머니는 어렵게 들어간 학교에서 아들이 잘 적응하길 바라지만 담임은 전학을 권유한다. 명문대 진학을 위해 친구들은 모두 과외를 받지만 지우는 그림의 떡이다. 지우의 딱한 사정을 안 이학성은 지우에게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천재 수학자의 가르침에 실력이 향상되는 것도 잠시 지우는 시험문제 유출범으로 지목된다.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면 이 사건을 무마해주겠다는 담임의 제의를 지우는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는데 이학..

세줄 映 2022.03.30

사막의 꿈 - 나호열

사막의 꿈 - 나호열 어느 사람은 낙타를 타고 지나갔고 순례자는 기도를 남기고 사라져 갔다 그때마다 화염을 숨기고 뜨거워졌다가 밤이면 무수히 쏟아져 내리는 별빛으로 얼음 속에 가슴을 숨겼다 나에게 머무르지 않는 사람들의 발자국을 침묵과 고요 속에서 태어난 바람으로 지우며 육신의 덧없음을 일깨우곤 했다 오늘도 낙타의 행렬과 순례자들이 덧없이 지나갔지만 나는 꿈을 꾼다 그 사람이 오고 백년 만에 비가 내리고 백년 만에 내 몸에서 피어나는 꽃을 어쩌지 못한다 ​안녕이라는 꽃말을 가진 사람 *시집/ 안부/ 밥북 후생(後生) - 나호열 저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얼굴도 없이 뼈도 없이 맹물에도 풀리면서 더러운 것이나 훔치는 생을 살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늘만 바라보면서 고고했던 의지를 꺾은 것은 내 잘..

한줄 詩 2022.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