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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와 구상나무가 있는 공원 - 류흔

벤치와 구상나무가 있는 공원 - 류흔 애인이 버리고 간 여자의 어깨가 흔들렸다 잔가지에 별이 열리는 밤 대규모의 슬픔이 군단(群團)처럼 걸어오는 밤이다 벤치는 여자의 엉덩이를 만지며 감싸 쥔 손가락 사이로 주룩 흘러내린 울음을 핥는다 잘 가라 나쁜 놈 그쯤 욕은 해야겠지 이해한다 여자여 스산한 야밤에 홀로 우는 너는 누구냐? 을씨년이야 벤치는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원맨쇼의 달인이다 엊그젠 인부들이 다 큰 나무를 데려왔지 무언가를 꾸미거나 모색하는 매우 기획적인 성향의 구상나무 때론 곧이곧대로 풍경을 일러주는 구상나무 구름다리 건너 동편 호수 옆에 발목을 묻은 밤의 우두커니 낮에는 피라미드 형신에 푸른 관상이었던 이제는 검은 실루엣이 돼버린 비구상 비현실 같던 이별이 현실임을 깨달을 때 여자는 비구상으로 ..

한줄 詩 2022.03.29

지천명의 시간 - 전대호 시집

언젠가부터 나이에 관한 시가 나오면 유심히 들여다 본다. 아마도 50을 넘기고부터였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되기 전에는 어서 나이를 먹어 서른이 되고 싶었는데 마흔 넘길 때 즈음 이렇게 중년의 문턱을 넘는구나 서글펐었다. 마흔 아홉쯤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느낌이랄까. 해마다 오는 봄과 가는 가을은 그대로인데 세월을 보는 눈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다. 하물며 오십 넘기고는 오죽할까. 오지 않을 것 같던 그 오십을 훌쩍 넘긴 지도 한참이다. 나이 드는 쓸쓸함 때문일까. 이런 제목이 붙은 시집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앞으로 이순을 넘기면 더욱 민감할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문장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어쨌든 시에 위로를 받으며 가능한 나이값은 하면서 살고 싶은 ..

네줄 冊 2022.03.29

섣부른 저녁 - 최규환

섣부른 저녁 - 최규환 방향을 정하지 않고 떠나는 날이 있었다 확률과 운으로 점쳐지는 조합인 것 같아 연고와 인연을 찾을 수 없는 되도록 사랑을 잃고 떠돌았던 언덕이나 숲으로 가고 싶었다 목적을 모르는 삶에 적당한 휴일 대합실에서 두 시간을 서성이며 신이 우리에게 넘겨준 협소를 염두에 뒀다가 몇 해 전 낯선 읍내를 지나면서 보았던 풍경이 생각났다 오일장이 파하는 무렵이었고 상인들은 식은 커피를 나눠 마셨다 종일 비슷한 태도로 방을 나눠주었을 여관 주인의 꼬부라진 말투가 친근했다 내려놓고 사는 것은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을 버려둘 수 있다는 말을 새겨두는 사이 가마치 통닭집에선 기름에 부풀려진 내막이 튀겨져 나왔다 스스로 용서가 안 되는 나의 비겁과 오랫동안 아팠던 길에서 만난 흐린 기억이 자꾸만 떠올라 방..

한줄 詩 2022.03.26

휘파람새 울고 동백꽃 지니 - 안태현

휘파람새 울고 동백꽃 지니 - 안태현 모처럼 홀로 되어 묵은 때 씻겠다고 뭍에서 섬으로 건너오니 휘파람새가 운다 가파른 비탈에 뒹구는 동백꽃 숭어리들 섬에서는 나를 오래 보관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싸구려 옷을 좋아하고 허술한 민박집도 마다하지 않는 그런 마음가짐이 내 생의 농도 너무 묽은 게 거슬리고 너무 끈적이는 게 두렵기는 하지만 술집에서 바다에서 점집에서 나사 한 개가 풀린 것처럼 낭비가 필요한 내 감정들 꽃 질 때 우는 새도 있는데 너무 우는 일을 잊고 살았다는 것인가 등 돌리고 가서는 밥 한 공기처럼 웃는 일이 많았다는 것인가 나를 태운 이 섬이 둥둥 떠서 망망대해로 흘러가면 홀로 우는 휘파람새가 되어도 좋겠다 파도에 밀리고 밀리어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이 되어 끝내 시처럼 살아내도 좋..

한줄 詩 2022.03.26

고사목 1 - 박소원

고사목 1 - 박소원 글렀어, 다시 잎이 자라기에는 습관성 절망들 나이테 속으로 골똘히 스며든다 가지마다 귀버섯이 피고 이끼가 푸르다 글렀어, 다시 잎이 자라기에는,,,,. 무른 목질에 절망들 평화적으로 새겨질 때 바람도 멀리서 온도를 낮추며 온다 겨울을 향해 고독하게 서 있으면 병 없이도 순간 죽을 것 같다 신도시 아파트단지 잘 가꾸어진 화단에서 죽어가는 병은 나에게로만 스며든다 여러 종의 여러 그루의 나무 중에서 병이 나에게로만 스며드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람 앞에서 부러지고 건조되는 그 속에 든 평화에 나는 이미 길들여졌다 달콤한 병증에 중독된 나는 순순히 병을 받아드리는 자세를 고수한다 오래 묵은 병의 의지로 나는 선 채로 죽어간다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이 의지는 가지 끝에서 죽음의 끝에서 ..

한줄 詩 2022.03.25

고비사막의 별 - 오광석

고비사막의 별 - 오광석 컴컴한 새벽 도심 모퉁이에 기대 앉으면 밤새 비추는 인공의 불들 스스로 빛나는 별을 보고파 고비사막으로 데려다줄 택시를 부르는데 눈을 감으면 떠나는 사막의 새벽 여행 양의 소리를 들을 때 울리는 사막민족의 고함 두건을 두른 채 비단길을 따라 사막을 건너는 카라반이 되어 전설의 카라호토를 찾는데 지평선이 보이는 사막의 밤 넉넉하고 포근한 게르 뚫린 천장으로 빛나는 별들을 보다가 길을 따라 들어오는 신의 숨결을 받고 잠드는데 눈을 뜨면 날카롭게 각을 세운 빌딩들 빛나는 네온사인 아래 흔들리는 도시인들 속에 오지 않는 택시 하늘에 희미하게 빛나는 사막의 별 *시집/ 이상한 나라의 샐러리/ 걷는사람 낙엽처럼 - 오광석 가끔 한 가지 색으로만 보일 때가 있어 노란색으로 보이는 날 홀로 주..

한줄 詩 2022.03.25

나의 머랭 선생님 - 김륭 시집

또 하나의 시집 전문 출판사가 나온 모양이다. 너댓 군데 메이저 출판사가 장악하고 있는 시집계에서 이런 출판사의 출현은 반길 만하다. 호시탐탐 낚을 준비를 하고 있는 내 시 그물망에 이 출판사가 들어왔다. 이라는 이색적인 출판사다. 먼저 세 권이 나왔다. 셋 중 하나를 고른다. , 몇 편 읽다가 바로 방생을 한 나머지 시집도 좋은 시집일 것이나 내 잣대로는 냉정하게 하나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고보면 내 일상이 참 매말랐다. 별로 공감이 안 가는 시까지 인내심 발휘하며 눈에 넣을 만큼 여유롭지 않다. 편식을 하는 내 얕은 지식에 반성도 한다. 나는 게으른 독자이지 착한 독자가 아니다. 김륭은 지금까지 나온 시집들 제목이 전부 이색적이다. 더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읽은 그의 시집들이다. , < ..

네줄 冊 2022.03.25

통점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낙화가 아프지 않다 - 강시현

통점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낙화가 아프지 않다 - 강시현 붉은 실루엣을 걸친 이별은 슬픔의 몫 아득한 헤어짐을 위하여 이별에게 슬픔의 보따리를 안겨 떠나보내지 않기 위하여, 이제는 하관처럼 분명한 사건 통점을 잃어버린 나는 더 이상 낙화가 아프지 않다 한 생애의 품격을 정하는 것은 쓸쓸함의 강도에 있겠으나 먹고사는 것 자체가 예술이라던 장사치의 푸념이 더 미더운 시간 복수초를 달여 장복하면 말기암도 낫는다는 헛도는 소문과 흑단 같은 용 문신으로도 가려지지 않던 나약한 흉터, 상상을 믿어야만 신의 얼굴이 보인다던 종교의 힘 무엇이라도 잡고 싶었던 절박한 손 초정밀 과학으로 몸단장을 하고 초자연적 미신으로 머리단장을 하고 늘어선 인텔리전트빌딩의 거리에서 흔들리던 현생의 가벼움 생명 부지의 판단은 목구멍의..

한줄 詩 2022.03.24

발 없는 남자의 구두 - 배한봉

발 없는 남자의 구두 - 배한봉 구두를 사려고 마트에 갔다. 정든 나의 구두. 몇 차례 굽과 밑창을 갈았던 구두가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고 너덜너덜 삭아 내린다. 어떤 것이 좋을까. 이것저것 신어보며 진열대를 한 바퀴 살펴보는데, 누가 나를 빤히 쳐다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얼굴을 돌리는 그 남자, 발이 없다. 무엇엔 놀란 듯 화들짝, 휠체어를 돌리는 남자의 등이 막막하다. 그가 미처 거둬가지 못한 눈빛이 한참이나 남아 서성대는 구두 진열대 앞에서 나는, 깊은 허방에 빠진다. 깜깜하다. 발 없는 사내. 그가 물끄러미 바라보다 흘린 마음 참 오래 깜깜해서 나는 낡은 구두가 지켜온 내 발 덥석 두 손으로 감싸본다. 울컥, 가슴 복받치는 발 고린내! 내가 사려 했던 구두는 발 없는 남자를 따라갔..

한줄 詩 2022.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