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通

대산문화 2022년 봄호, 발견 시

마루안 2022. 3. 14. 22:35

 

 

 

희망을 내포하고 막바지로 치닫는 중일까. 코로나 전염병이 창궐하는 중에도 어김없이 봄은 왔다. 꽃이 피기에는 아직 이르지만 남쪽에는 매화가 피기 시작한 모양이다. 대산문화 봄호에서 눈에 띄는 시를 발견한다.

 

좋은 시는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 눈과 가슴에 스며들기 마련이다. 이런 걸 공감이라고 하던가. 잊힐세라 필사를 시도한다. 한 자씩 누를 때마다 이 시가 더욱 가슴에 박힌다. 행간은 물론이고 助詞 하나까지 버릴 게 없다. 여운이 오래 남는 시다.

 

 

 

탑신에 내리는 눈 - 기혁

 

 

촛불이 내부의 어둠을 태워

불을 밝힌다고 속단했으나

 

나의 무게는 이내 돌멩이의 내면에 부딪치고 말았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던 인연들이 단 한 번 발길질로

무너져 내릴 때 그것은

스스로 열린 적 없는 암석의 외부가 아니라

수천 년 풍화로도 어쩌지 못한

점박이 응어리,

제 몸을 깎고 깎아 기괴한 조각처럼 놓인 고백이었다

 

발끝의 충격보다 인생 어딘가를 후려치는

고통의 정체가 궁금해질 무렵

입구도 출구도 없이

오직 중력의 힘으로 이승을 붙들고 있는 저 고독이

 

서로의 내면을 딛고 선 모습을 본다

 

매 순간 절을 올리며 남몰래 돌탑을 쌓는 자의 간절함이란

시간의 광기에 맞서는 윤회의 흔적일까?

 

돌의 내부에 우주가 있고

그 어디쯤 신의 거처가 있다고 믿는 어두운 자들이

하나둘 촛불을 들고 모여들 때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행렬은 그들의

피부를 닮아 붉게 물든다

 

시린 함박눈을 맞으며 전생의 입구처럼 서 있는 흉가(凶家)

밤마다 인연이 오는 쪽으로 눈을 치우다

되돌아갈 발자국마저 지워버리는 운명을 어떤

무신론자도 믿지 않았지만

 

온몸이 고백이었던 사람에겐 탑신(塔身)*에만 쌓이는 폭설이 있다

 

신 없는 기도로 연명해온 사랑이

마침내 탑의 주인이 되면

육신을 허무는 신의 사자(使者)로 환생한다는 속설

귀신조차 오지 않는 독한 몸을 이끌고

나도 오래된 슬픔 몇 개를 감춘다

 

눈 덮힌 고립의 시간으로

삶의 주름이 늘어난 얼굴을

 

무너짐의 끝에서야 체온의 고해성사라 부른다

 

 

*탑기단(塔基壇)과 상륜(相輪) 사이의 탑의 몸.

*대산문화, 2022년 봄호

 

 

 

 

벚꽃 추위 - 기혁

 

 

겨울의 수다를 참지 못한 아지랑이가 토닥토닥 흔적을 남긴다

 

진흙탕 장난을 치던 봄이 영하(零下)의 분실물을 들쑤신다

 

울음을 터트리며 도망치던 겨울은 잠시 그늘에 머물렀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끊임없이 분실물의 내력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벚꽃이 살벌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피기 시작했다

 

잃어버린다는 건 얼마나 애처로운 삶의 출처일까

 

봄은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그해 겨울이 그랬던 것처럼

 

벚꽃이 흩날리던 그늘마다 불룩하게 할 말이 쌓인다

 

 

 

*기혁 시인: 1979년생. 시집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기립 박수>, <소피아 로렌의 시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