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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천문학 2022년 봄호에서 만난 시

천변 풍경 - 이진명 계절 바뀌도록 걸음 뜸했던 이웃 천변에 천변 풍경이 생겼다 왜 아닐까 당연히 천변이니 천변 풍경은 생겨나는 것 물을 것 없이 죽순처럼 커피 커피 커피 세상 동네마다 카페가 돋는 시절 웃었다 옛날 감성 복고풍 찐 냄새 대놓고 피운 지난 연대의 이름표 나무판에 한자로 새겨 단 川邊風景 버스 다니는 큰길에서는 천변 풍경 보이지 않는다 버스 다니지 않는 작은 다리 길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다리 아래로 예닐곱 돌계단 내려서야 만난다 천변 풍경 테크에서 커피를 앞에 놓고 앉았다 앉아 봤다 그래 봤다 커피를 넘겼다 계절은 또 곧 바뀔 것이다 시선을 멍히 던졌는데 한판 투명한 커다란 거울처럼 물 얼굴이 돈다 북으로 멀리 북한산 이마가 마주쳐 오고 남으로는 멀지 않게 미아리 고개가 오래 있다 동으로는..

여덟 通 2022.03.24

나와 함께 사는 것의 목록 - 이기철

나와 함께 사는 것의 목록 - 이기철 비애야, 나의 종잇장 같은 슬픔을 아느냐 멀리서 놀러 온 구름, 바람이 데리고 온 가랑잎, 쉬어 가라 해도 서둘러 떠나는 햇빛, 칠 벗겨진 녹색 대문, 엽서를 기다리느라 몸이 닳은 우체통 너무 쉬이 입 다무는 나팔꽃, 핏방울로 피는 샐비어 도꼬마리, 키다리, 꿩의비름, 물봉선화, 도라지, 구절초, 메밀꽃, 이질풀 너무 정직해서 슬픈 것들아 네 이름을 부르는 백로지 같은 나의 비애를 아느냐 끼니에야 찾는 둥근 사발, 낮아서 편한 쟁반, 몸이 하얀 연잎 접시, 빛바랜 마호가니 탁자, 짝 잃은 보시기, 성급한 전기밥솥, 불평 많은 식칼, 잎 푸른 상추, 보라색 가지, 참매미의 이별 노래를 들으며 묵은 책상에서 시의 언어를 빌려 쓰는 이름들 비애야, 내 기다림의 긴 끈을 너..

한줄 詩 2022.03.21

나이를 먹는다는 것 - 유기홍

나이를 먹는다는 것 - 유기홍 이제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 세상에 많은 연결고리를 보았다는 것 몇 번 정의를 계산한다는 것 나의 위치를 생각해보았다는 것 친구가 없다는 것 사회적 위치를 확인하는 것 오늘이 즐거운 것 내일의 죽음을 망각했다는 것 그래도 바람과 꽃이 좋다는 것. *시집/ 모든 관계에서 오는 시간의 암호/ 북인 별일 없이 산다 - 유기홍 글을 처음 배울 때부터 많은 반대말을 찾아왔지 시작은 무식하지 않기 위해 유식하기 위해서 숙제로 비슷한 말과 반대말을 찾았지 게으르지 않기 위해 부지런을 떨었고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난이 싫어 나도 막연하게 부자가 꿈이었지 불행이 창피해서 행복한 척도 했었고 어두운 밤이 싫어 밤에 눈 감고 자는 시늉을 했고 낮에는 아무도 모르게 빨간 눈으로 졸곤 했지 ..

한줄 詩 2022.03.21

재난 인류 - 송병건

경제학자인 송병건 선생의 책이다. 코로나로 2년 넘게 온 지구를 쑥대밭으로 만든 지금에 딱 어울리는 책이다. 다소 두꺼운 책이지만 소설책 읽듯이 흥미롭게 읽었다. 질병과 자연재해로 인류가 겪어온 역사를 대중적인 문체로 잘 썼다. 가령 14세기 중엽에 흑사병으로 유럽 인구 3분의 1이 사망하는 바람에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그런 악조건에도 인류는 꿋꿋하게 살아 남았다. 혼자는 나약하지만 집단은 강하다는 것을 잘 알려준다고 하겠다. 16세기 신대륙에 상륙한 유럽인이 천연두를 전염시키는 바람에 원주민이 줄줄이 죽어나간 사실도 알게 된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질병이 인간의 목숨을 위협했는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홍역과 콜레라로 숱한 죽음을 가져온 질병사도 설명한다. 지..

네줄 冊 2022.03.21

연대기 - 육근상

연대기 - 육근상 강물이 무명의 종이처럼 버드나무 가지 매달린 헝겊처럼 칼빛으로 출렁거린다 지난겨울에는 물결 소리 견디지 못한 강물 다 얼어붙었다 며칠 전에는 매바위 넘던 노을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머릿수건 고이 풀어놓고 물살 건너갔다 산작약은 또 무슨 억울한 사정 있어 싸락비 불러내어 이마 쿵쿵 찧고 있는가 봉분 옆으로 양단 마름이나 끊어다 입힌 듯 할미꽃 고개 끄덕인다 나는 아버지가 매어놓은 뱃머리 마을 살면서 달빛이며 꿩이며 풀잎의 서러운 얘기 다 들어주었다 오늘 밤에는 강물이 남은 신에 다 털어놓는 듯 너울너울 흘러간다 *시집/ 여우/ 솔출판사 이 몸이여 홀로 살아가는구나* - 육근상 나는 이제 빨랫줄에 해지고 구멍 난 셔츠로 걸려 있다 바람 들락거리기 좋았으니 풀 먹은 베옷처럼 얼어 앙상한 갈비뼈..

한줄 詩 2022.03.20

마스크 꽃 - 박수서

마스크 꽃 - 박수서 - 코로나 19 봄꽃도 피지 않았는데 먼저 사나운 바람이 불어왔지 바람은 세상의 꽃잎을 때리고 울렸어 멍든 개나리꽃이 누렇게 놀라 주저앉아 버렸고 병든 개망초는 부전나비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어 접시꽃은 잎겨드랑이가 쑤시고 절려 밥을 짓지 않았어 세상은 바람에 혼쭐이나 콜록콜록 계절을 보냈고 이윽고 겨울이 왔어 바람은 더욱 기운이 왕성해졌고 집밖으로 나가는 일이 무서운 애기동백은 바람이 멈출 때까지 방바닥에 엎드려 기다리고 있어야 해 세상 꽃이 아파 꽃밭은 벽처럼 바람막이가 꽂혔어 꽃도 꽃들끼리 어울려야 예쁘고 꽃다울 텐데, 걱정하지 마 흰 꽃, 검정 꽃 사람들의 입을 막고 착한 꽃폈으니 바람이 아무리 불어도 꽃피는 일은 무사할 거야 *시집/ 내 심장에 선인장꽃이 피어서/ 문학과사람 ..

한줄 詩 2022.03.20

덜어내고 덜 버리고 - 오한빛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면서 이런 류의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예전엔 환경문제를 그저 입으로 떠들었다면 소극적이나마 실천하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거창할 것은 없다. 이 책 제목처럼 덜어내고, 덜 먹고, 덜 버리자는 거다. 무턱대고 실천하기보다 이런 책을 읽고 자극을 받거나 공부를 하면 된다. 그러다가 작은 것부터 조금씩 실천해 보는 거다. 좋은 자동차나 명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남의 차와 옷차림에도 관심을 두기 마련이다. 나는 그런 것보다 되레 이런 책에 관심이 간다. 옷장에 옷이 가득한데도 입을 옷이 없는 것처럼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이 책의 저자는 미혼의 젊은 여성으로 친언니와 함께 살고 있다. 한창 멋을 부리고 꾸미는 데 돈을 쓸 나이인데도 화장도 몇 가지 기초 화장 외에는 하지 않고 옷도 교복처럼..

네줄 冊 2022.03.19

구름의 행로 - 복효근

구름의 행로 - 복효근 어제는 바람이 서쪽에서 불어왔으므로 구름은 동쪽으로 흘러갔다 오늘은 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구름은 흘러갔다 아침녘엔 어치가 와서 놀다 갔는데 오후엔 물까치가 왔다 갔다 다시 새를 기다리는데 가까운 선배 모친 부음이 왔다 잠히 후엔 거리조차 먼 선배 모친의 부음이 왔다 둘 다 가고 싶지 않았지만 먼 쪽을 택해 조문을 갔다 빈소에 아는 조문객도 없고 해서 슬그머니 나와 바닷가 횟집에서 소주를 마셨다 아닌 쪽에서 부음이 오기도 하고 없는 쪽에서 구름이 오기도 한다 내가 가는 날 아주 먼 후배가 조문을 왔다가 가까운 중국집에서 짬뽕을 먹고 갈지도 모를 일 내일은 박새가 몇 마리 놀러 올지도 모른다 혹은 아무것도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집/ 예를 들어 무당거미/ 현대시학사 장례식장 엘리베..

한줄 詩 2022.03.19

홀로 남은 등 - 김남권

홀로 남은 등 - 김남권 쓸쓸함이 어둠의 등 뒤로 소리 없이 쌓이고, 울음소리 감춘 새벽을 걸어 나와 풀잎 아래 이슬로 눕는다 동이 트도록 풀잎의 뒤척이는 소리로 강물은 깨어나고 하늘의 첫 물을 길어와 홀로 남은 별을 씻었다 별도 눈물을 흘린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지상의 슬픈 등 하나를 보려고 수억만 년 고향을 버리고 내게 왔다 지친 하늘의 몸을 누이려고 꽃을 한 아름 안고 왔다 햇살이 빛나는 동안에도 홀로 남은 등은 빈 그림자를 안고 말이 없었다 한 번도 안겨본 적 없는 등에는 굳은살이 배겨 있었다 그림자도 나이를 먹으면 단단해진다는 걸 처음 알았다 누군가를 안아보면 안다 가슴이 시린 사람의 등에선 북소리가 난다는 것을, 속이 텅 비어 있어서 누군가 두드려주지 않으면 저 홀로 바람에 길들여진 채 갈라..

한줄 詩 2022.03.16

당신 또한 천사들의 장난감을 가졌지 - 김륭

당신 또한 천사들의 장난감을 가졌지 - 김륭 다른 사람을 가지고 싶은 마음 몸 밖으로만 떠돌다 입이 지워진 말을 모국어로 사용하는, 그러나 언제나 늙은 고아 같아서 아프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명사라고 쓴다, 가만히 물을 두 뺨에 대 보는 돌멩이처럼 얼마나 더 울어야 보일까? 몸에 없던 구멍이 생겼다 개가 드나드는 개구멍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꺼내거나 사람이 사람 속으로 숨어드는 구멍, 천사들이 날개를 말리거나 장난감을 갖다 놓아 아직 그 누구도 찾지 못한 구멍 요양병원에 누워 계신 어머니 두 뺨에도 스르르 나타나기도 하는 구멍에 눈이 멀고 귀가 먼 나는, 그런 내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당신 또한 옛날 영화 속으로 돌아가서는 오래된 미래가 됩니다 다시 기다려야 됩니다 아주 잠깐 자고 일어났더니 나이..

한줄 詩 2022.0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