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양철지붕에 비 긋는 소리 - 장시우

마루안 2022. 3. 13. 19:26

 

 

양철지붕에 비 긋는 소리 - 장시우

 

 

따뜻한 그늘이 보이지 않는 오늘은

비 내리는 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계절,

양철지붕에 비 긋는 소리 듣는

낯익은 듯 낯선 저녁

귀 기울이다 익숙해진 소리들 사이

벽을 넘어온 보일러 소리가 방을 흔든다

혈관에 피가 도는 소리 같은 거

기척을 보낸다는 것

살아 있다는 고백 같은 것

잠잠해진 가습기를 건드린다

기다렸다는 듯 물방울을 뿜는다

너도 살아 있구나

라디오 전원을 넣고 볼륨을 올린다

어댑터와 규칙적이거나 불규칙하게 엉킨 전선을 타고

사람이 오고 음악이 흐르고

숨어 있던 소리들 쏟아진다

라디오 속에 살던 사람들이 궁금했던 때가 있었다

그 사람들, 어느 과거에서 둥둥 떠다니겠지

딸!깍! 전등을 켜자 눈을 뜨는 방

어느 선을 타고 건너온 걸까 저 빛은,

허공을 떠다니는 미세한 물방울을 헤아린다

자꾸 감기는 눈꺼풀은

저 축축한 빗소리 때문일 거야

눈 뜨면 나는 거기 있을 거야

 

 

*시집/ 이제 우산이 필요할 것 같아/ 걷는사람

 

 

 

 

 

 

11월, 밤 그리고 기차 - 장시우

 

 

오늘 이야기가 될 것 같은 밤이니까

누가 노크해도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 수 있어

아이들만 이야기를 사랑하는 건 아니야

 

어서 와 머그잔에 곱은 손을 녹이고

저 검은 짐승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봐

반짝이는 별 하나 그저 주워 갈 수 있을지 모르지

11월 밤이니까

 

기차가 달려오네

기차 창밖으로 빛은 스쳐 가고

기차는 어둠 속으로 달리지

밤과 저 기차는 어쩌다 친해진 걸까

사람들은 눈을 감거나 무심하게 휴대폰에 눈길을 두거나

맥락 없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두곤 해

어쩌다 차창에 비친 사람과 눈이 마주쳤어

서로 머쓱한 시간,

역이 가까워지자 사람들은 서둘러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다독여

정차 역에서 빠르게 내린 사람들은

서두른 기색을 털어내고 한결 느긋한 걸음으로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느슨한 표정이야

기차는 서둘러 다음 역을 향해 달리지

뒷모습만 남기고 가는 사람들을 두고

떠나는 기차는 어떤 표정일까

그 표정을 본 적 있니

기차는 밤으로 달려가네

밤으로 달리는 기차는 무얼 본 걸까

 

어떤 상상은 만지작거리기만 해도

터져 버려 흘러내려

 

 

 

 

# 장시우 시인은 부산 출생으로 200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섬강에서>, <벙어리 여가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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