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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막 - 박숙경

붉은 사막 - 박숙경 눈물 글썽이던 별 하나를 머리맡에 두고 어린 왕자와 사막여우와 불시착 사이에서 당신을 또 놓쳤다 누군가의 뒤를 따라 걸었지만 발자국은 금세 사라졌다 온몸이 아파왔다 새끼를 빼낸 자국은 오래된 모래층 같아서 손톱을 세워 긁고 나면 다시 자라나는 배꼽 한참이나 눈을 뜨지 못하고 발버둥 쳤다 간신히 새벽꿈을 건너면 온통 붉은 사막 몸이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주소 낙타는 더 이상 울지 않는다고 꿈속에서 누가 말했던 것 같다 사막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시집/ 그 세계의 말은 다정하기도 해서/ 문학의전당 흔적 - 박숙경 -대상포진 압축된 잠복기가 풀리면서 꽃의 비명이 바람에 실려 왔다 저, 출처 불분명의 레드카드 낯선 내가 뾰족이 돋았다 자정 부근에서야 어둠의 모서리에 오른쪽의..

한줄 詩 2022.03.12

내 마음속 용 - 장석주

내 마음속 용 - 장석주 -이중섭을 위하여 그대 때문에 세상이 한층 살 만해진다. 갚을 길 없는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의 빚 한국 소처럼, 뿔을 치켜세운 분노도 슬퍼 마음의 무거움 잠시 벗고 가벼워지면, 어제는 몹시 외로웠다고, 오늘은 못 견디게 그리웠다고, 너를 사랑한 것은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라고, 사랑하는 이에게 엽서를 쓰자. -나는 세상을 속였어. 예술을 한답시고 공밥만 얻어먹고 공술만 얻어먹고 놀았어. 후일 무엇이 될 것처럼. 나는 이 세상에 죄송해. *시선집/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난다 옛 노래 - 장석주 저녁으로 감자를 구워놓고 무쇠 난로 연통가에 젖은 옷 마르기를 기다렸네. 목수인 아버지는 늘 귀가가 늦고 낮은 담벼락 담뱃값만하게 박힌 창문으로 알전구 불빛 병아리 오줌만큼 흘러..

한줄 詩 2022.03.12

등화관제가 필요한 시간 - 정덕재

등화관제가 필요한 시간 - 정덕재 허리 두께가 확연히 다른 남자와 여자가 길을 걸어간다 남자는 인도와 차도를 가르는 경계석을 밟고 간다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피는 10대 남자와 여자가 바닥에 연신 침을 뱉는다 보도블럭 사이 물길이 흥건하다 택시를 잡는 취객 하나가 손을 흔든다 손을 흔들 때마다 길 가운데로 들어간다 밤이 길어 귀가하지 않는 사람 밤이 길어 불이 꺼지지 않는 간판 밤이 길어 달리는 택시 지팡이도 길을 잃는 누구도 보행하지 못하는 암흑이 필요하다 등화관제를 알리는 사이렌은 몸과 마음의 교대근무를 알리는 신호였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윤수일의 쓸쓸한 아파트 - 정덕재 8천 5백 설마 8천 5백 원은 아니겠죠 1억 5천 2억 3천 3억 2천 4억 5억 7천 7억 9천 9억 ..

한줄 詩 2022.03.11

손의 이력서 - 김명기

손의 이력서 - 김명기 손은 밥을 버는 힘이다 인디언들은 손의 힘을 돋우기 위해 사냥 나서기 전날 밤 밤새 손바닥을 두드리거나 손으로 북을 쳤다 막노동 새벽밥 사십 년이나 먹었다는 목수 오야지 황 씨 벌겋게 달아오른 드럼통에 언 손을 녹이고 허리춤에 장도리를 빼내어 굵은 손가락 마디를 두드린다 "요로코롬 두딜기 주야 곱은 것이 바로 펴지제 하도 두딜기서 손도 지 손인지 모를 것이여 손바닥을 두딜기면 굳은살 땜시 튕겨 나온당게" 살리겠다고 내민 손을 해치는 줄 알고 물어 버린 개 버림받은 상처가 고스란히 손등에 옮았다 상처를 붕대로 감싸고 보니 잡힌 저나 잡아 온 나도 한동안 밥걱정은 덜겠구나 싶은 날 인디언처럼 늙은 목수처럼 상처 입은 내 손이 모처럼 선해 보인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

한줄 詩 2022.03.11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 김명기 시집

시집 나오기를 기다리는 시인이 있는데 김명기 시인이 그렇다. 어쩌다 이 시인에게 꽂혀 찐팬이 되었다. 누구 영향 받는 것을 지독히 싫어하는 성격이라 시인에 대한 호불호도 내 스스로 터득한 기술이다. 채이거나 엎어지면서 무릎팍이 까지는 온갖 생채기 뒤끝에 얻은 것이다. 나는 지금도 시인이나 평론가 등 명사들이 추천하는 책을 믿지 않는다. 처음부터 안 믿은 것은 아니다. 믿고 따라가 봤는데 별로였기에 가능한 따라가지 않는 것뿐이다. 그들의 지성을 존중한다. 그들은 좋은 책을 추천할 자격이 있다. 다만 내 능력 밖의 고급 수준이거나 나와 코드가 맞지 않아서다. 내가 아무리 독고다이라지만 귀를 완전히 막고 사는 것은 아니다. 思考도 고여 있으면 썩는다. 나라고 왜 확증편향이 없겠는가. 어쩌면 태극기 할배들 못지..

네줄 冊 2022.03.11

사흘째 가는 비가 와서 - 심재휘

사흘째 가는 비가 와서 - 심재휘 -런던 사흘째 가는 비가 와서 굴뚝 연기들도 지붕을 타고 흘러 내렸다 보건소의 얼굴 짙은 의사는 웅얼거리는 표정을 겨우 만들었다 골목까지 내려앉은 하늘 불지 않는 바람 젖기만 하는 나무의 날들, 지빠귀는 한번 더 운다 런던은 비닐로 오래 덮어둔 반죽 같고 저 멀리 빌딩 옥상에서 비 맞으며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까마득하지가 않고 비에 웅크린 지붕들처럼 걷는 소리만 가득한 거리 그외에는 신기한 것도 궁금한 것도 없이 비가 온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조차 모두 한통속이 되어 버스를 기다린다 오른쪽을 바라본다 얼굴이 뭉개지도록 사흘째 가는 비가 와서 얼굴에서 흘러 내린 자그마한 얼을 손에 받아 들고 걸음은 멀리 가야 한다 반죽을 아무렇게나 뜯어도 수제비가 되던 그런 생애를 다시 ..

한줄 詩 2022.03.08

백장암에서 - 박남원

백장암에서 - 박남원 찬 바람 아직 부는 이른 봄 산굽이 물굽이 짚신처럼 길을 떠나 지리산 백장암 같은 곳에 가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다. 잔설이 밀가루처럼 남아있는 산지붕이 코앞까지 다가오며 백장의 거친 숨결이 어슬렁거리듯 넘나드는 천의 계곡 굽이쳐 흐르는 물살이 일순 저승처럼 아찔한 발아래 낭떠러지로 곤두박질치기 일쑤지만 그 어지러운 기슭을 올라 일단 백장암 마당까지 이르기만 하면 두툼한 이끼를 탑신에 털옷처럼 입은 삼층석탑이 놓인 절 마당에 오르는 동안 내내 세상을 집어삼킬 것 같던 지리산이 오히려 그곳에서는 한 식구처럼 모여 있고 세상 너른 바다도 잔잔한 파도로 고스란히 앉아 있다. 지심 깊은 꽃 숨결이 힘겹게 지상으로 밀려 올라오는 이른 봄 백장계곡. 아직 바람 불고 살 시린 발아래 세상, 마저 ..

한줄 詩 2022.03.08

귀향 - 이현조

귀향 - 이현조 무서울 것도 안 될 것도 없는 서른을 지나 만만한 것도 되는 것도 없는 마흔을 지나 도망치듯 돌아와 슬하에 들던 날 중년의 아비는 두려움 가득했고 노년의 아비는 암 덩이 가득했다 다 잃은 아비와 다 버린 아비는 마주 보는 거울만 같아서 사랑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상례라 독설만 퍼부어댈 때 노년의 아비 담 그늘 향해 혼자서 되뇐 말 유언이 되고 말았다 난 그래도 넷 중에 니가 젤 잘될 줄 알았다 *시집/ 늦은 꽃/ 삶창 언덕 - 이현조 아버지 초상에 형은 파묘를 들먹였다 벌초 한 번 해본 적 없는 형은 진보적이고 개방적이므로 산소 따위 무의미했다 눈물도 조의도 없는 초상 각자, 접대에 바빴다 할아버지 산소도 파할 것이므로 드넓은 바다에 아버지를 모셨다 할아버지 산소는 터가 좋다더라 무당의..

한줄 詩 2022.03.07

실수 같은 봄이 찾아와 - 김애리샤

실수 같은 봄이 찾아와 - 김애리샤 잠이 오지 않아 창문을 열었는데 초승달이 가느다랗게 나를 바라보고 있던 밤 적적한 공기 휘저으며 심호흡 한번 했는데 당신 냄새 섞여 있어 눈물 났던 밤 꼭 당신이 아니어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애써 결심했던 밤 문득문득 실수로 채워져 빛났던 그때들 나의 향기를 예쁘게 말려 간직하겠다던 당신의 노래들은 뒤척일수록 멀어지고 나의 목소리는 점점 더 볼품없어지고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지워져 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순간들 그렇고 그런 순간들처럼 딱딱한 공기로만 채워지던 우리 사이 만질 수 없는 꿈들이 계속되는 새벽 불면증처럼 울던 나의 표정들 차라리 더 아픈 게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 실수를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환했던 그때 세상 모든 밤들엔 ..

한줄 詩 2022.0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