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 공장의 불빛 - 이우근

마루안 2022. 3. 13. 19:33

 

 

저 공장의 불빛 - 이우근

 

 

노동이 제물(祭物)이지는 않다

신성(神聖) 하다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걸레 삶은 물로 밥해 먹는

그 인격은 천혜(天惠)의 신분에 반비례

 

남의 짧은 길, 나는 왜 돌고 돌아가는 지

 

도생(圖生)의 결과물로

몇 푼 봉급, 훌륭했지, 부끄럽지 않으이

내 한 몸 희생하면 즐거운 나날

훈장이 아니었지만 정말 훈장이었지

잘, 더럽게, 질기게, 살았다고,

삶의 명세서를

나의 코밑으로 드민다.

그러나, 가령, 그렇더라도

불빛으로 위장을 해선 안 된다

불빛으로 위장되어서도 안 된다

 

생산은 있어도 자위로는 안 된다

소모품으론 더 이상 안 된다

밥 먹기 위해

땅을 다지는 날들

좀 서러운 날들의 연속

어쩌나, 도시락으로 챙김,

그래도 가야 하니,

참 먼 길.

 

 

*시집/ 빛 바른 외곽/ 도서출판 선

 

 

 

 

 

 

콘돔 장사 내 후배 - 이우근

 

 

아침에 뒷좌석과 적재함에

콘돔을 가득 싣고

모텔과 편의점을 돈다

부피가 작아서 힘도 덜 든다

물과 음류수 장사 땐 부피에 비해 마진이 박했는데,

이건 괜찮다

은밀한 치부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들을 위해 누군가는 이 일을 해야 하리라

원초적인 욕망과 본능을 제어하는 일에

일조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배설물을 방어하기 위한

물건을 공급하는데,

한 사람의 뜨거움이 무위(無爲)로 판명된다는 것,

그것 때문에 먹고 살기에 쓸쓸하다

 

사람들은 모르더라,

다들 폼나는 일만 하려 하지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돈 되는 것은 다른 곳에 있더라

비록 배운 거 없어도

본질에는 접근하게 되더라

비록 콘돔을 팔아도

새끼들 키우는 데 정말 알짜배기더라

나는 장막 뒤의, 무대 밖의 배우라고 할까

그렇다,

질기고 탄탄하기만 하면

그렇게 세상을 견디며 건널 수 있다

또 스스로 투명하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시인의 말

 

오규원을 생각한다.

홍신선을 생각한다.

어머니는 단단하고 담담한 사슬이다.

그 이름을 생각하며, 그것이 힘이 되어

죽을 때까지 부족해도 길을 나선다.

소멸(消滅)과 파훼(破毁),

잔상(殘像)과 반추(反芻), 그 너머

적멸(寂滅)의 끄트머리에 닿을 수 있다면

말이다.

어림도 없겠지만, 꿈꿀 권리,

가능성이 없다면 그게 무슨 삶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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