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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무덤 - 김륭

흑백 무덤 - 김륭 뇌를 개처럼 부려 심장까지 내려가 보는 날이 있다. 나는 아이가 된다, 무덤을 보면 뭔가 모자라게 늙었던 내가 꽉 차오르는 느낌 미친 듯이 나는, 나를 완전히 믿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가벼운 한숨과 깊은 농담을 나누며 지나가는 바람마저 가만히 노루 똥처럼 그냥 옆에 앉히면 보인다. 기억이 몸을 앞질러 가서 지은 집, 뒤돌아보면 심장과 함께 씹어 먹고 싶은 혀, ..... 무릎, 그리고 빌어먹을 나이 같은 것 그러니까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치고 가는 기억이 있다. 나는 모르는 척한다. 그것은 정말 모른다는 말이 파 놓은 무덤, 개를 뇌처럼 부려 오래전에 찢긴 눈꺼풀이라도 가져온다. 고작 일 년에 두어 번 찾아뵙는 아버지, 당신 유골이 담긴 작은 항아리가 관상용 화분처럼 보일 ..

한줄 詩 2022.02.28

아버지의 호야등 - 김용태

아버지의 호야등 - 김용태 철없던 때, 결국 막차를 놓쳤다 잔별들 바람에 쓸리어 가자 잇대어 비가 내렸다 쉼 없이 걸었다 낮에도 혼자 넘기 꺼려하는 진고개 노망든 귀머거리 여자가 얼어 죽었던 움막이 아직도 허물어지지 않고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낚아 챌 것만 같은 카랑카랑한 욕지거리와 함께 굶은 짐승처럼 오도카니 도사리고 있었다 몇 해 전인가, 아랫말 춘식아재가 술에 취해 돌아오던 길에 도깨비에 밤새 씨름을 하다 살아 왔다던 애장터, 칠흙 같은 이 소나무 숲이 끝나면 그 곳인데 무사히 지날 수 있을까 그 때 불 빛 오, 멀리서 흔들거리며 다가오는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우골탑 신화(牛骨塔 神話) - 김용태 젊은 아버지께선 정남향, 볕 잘 드는 곳에 그분의 거처를 마련하시고 식구를 늘리..

한줄 詩 2022.02.28

뒤죽박죽 일요일의 풍경 조각

가끔 전통 시장을 간다. 생선 가게 앞에서 두 사람이 낑낑거리며 대형 상자를 내린다. 와! 이렇게 큰 생선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다. 딱 사람 크기다. 생선 대신 내가 저 관처럼 생긴 상자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전통 시장에서 내가 사는 건 과일이 제일 많다. 가끔 닭강정이나 꽈배기를 살 때도 있다. 오랜 기간 가는 단골 떡집에서 시루떡을 사기도 한다. 식성도 바뀌는지 나이 먹으면서 떡을 좋아하게 되었다. 예전에 그 사람은 늘 사랑을 확인했다. 가끔 내 표정을 보며 물었다. "나를 사랑하기는 하는 건가요?" 그냥 웃지만 말고 빈말이라도 그렇다고 할 걸 그랬다. 사랑 점검의 마지막 대사는 늘 똑 같았다. "사랑에도 보증수표가 필요한 거예요." 내 사랑은 보증금은커녕 공수표였다. "개새끼" 그 사람이 마지막..

다섯 景 2022.02.27

늦은 흔적 - 우혁

늦은 흔적 - 우혁 너를 밟았다 그리고 내 손에 너의 발자국이 묻어 있음을 뒤늦게 알아챈다 손이 시렸고, 또 누군가의 화초처럼 난 늙는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 아니기에 끝없이 되물어보는 버릇 언제나 당신은 두 번씩 답하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다 구름이 발자국이며, 하늘이라 이름 붙인 어느 우주는 이토록 동그랗다 어떻게 하든 난 길을 따라갈 것이었으면 굳이 길을 길이라 하지 않아도 좋으리라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버릇 - 우혁 늙지 마라 했던 짧은 충고는 손등 위에 주름으로 남았다 솔직히 거짓말을 하려 했던 것은 아니지만 거짓말들은 의도와 상관없이 재림했다 오우 너는 얼마나 거룩했지 오늘, 지금, 그대로 늙지 마라 했던 충고는 알고 보면 고백이었다 예를 들면 자랑은 아니지만이라고 시작한 말들은 필히..

한줄 詩 2022.02.27

벤치의 혼자 - 박인식

벤치의 혼자 - 박인식 벤치에 혼자 앉아 있다 기다리는 그 무엇은 혼자 온다 하니까 아무도 누구를 기다리느냐 묻지 않는다 무대 위는 줄곧 나 혼자니까 연극 끝날 때까지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 온다는 그 무엇은 혼자라도 끝내 오지 않아 아무도 누구를 기다리느냐 묻지 않을 것이니까 막이 내려와야 그 무엇이 혼자 오길 기다리지 않는 혼자로 돌아갈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여기 벤치는 거기 조리 있는 벤치와는 달리 부조리 연극의 벤치 막 또한 올라간 적이 없어 아주 내려오지 않을 부조리의 막 연극이 끝난다 해도 나는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니까 *시집/ 내 죽음, 그 뒤/ 여름언덕 고흐가 고갱을 만났을 때 - 박인식 아를르에서 고흐가 고갱을 만났을 때 열다섯의 내가 남태평양 타히티섬에서 고갱을 만나는 밀항을 꿈꿨을 ..

한줄 詩 2022.02.27

空의 풍경 - 임연웅 개인전

포스터에서부터 눈을 붙잡는 전시회가 있다. 임연웅 사진전이 그랬다. 포스터에 있는 사진 한 점만 보고 와도 마음이 풍족해진다. 포스터에 나온 사진답게 전시장 맨 앞에 걸렸다. 멀리 황룡사지가 보이는 길이다. 오래 서서 들여다 봤다. 인사동 갤러리 이즈는 독특한 외관에다 감상하기 좋은 전시장이다. 인사동이든 청담동이든 생겼다가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있었다가 없어진 화랑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인사동만 봐도 10년 넘게 같은 자리에 있는 화랑이 몇 개나 될까. 아마도 사설 전시장으로 접근성으로나 전시장 동선으로나 이 정도 갤러리 드물다. 발길을 붙잡는 전시가 있을 때 코로나 시국에도 종종 들르는 곳이다. iS 갤러리는 문익점의 후손이 세운 문중문고인 라는 영문 앞자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임연웅의 전시는 전국..

여덟 通 2022.02.26

심장이 뛰던 시절 - 정덕재

심장이 뛰던 시절 - 정덕재 겨울이 끝나 갈 무렵 바지를 꺼냈고 허리는 두꺼워졌고 종아리는 가늘어져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걷겠다며 마음먹었더니 미처 준비하지 못한 심장은 헉헉댄다 계단을 오르지 않고 가파른 고개를 넘지 않아도 숨이 가빴던 시절이 있었다 리어카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숨소리와 최루탄 터지는 소리와 흔들리지 말자는 혁명의 노래와 공장 굴뚝의 연기와 갈아엎는 배추밭이 어울려 심장이 뛸 때가 있었다 3층 계단만 올라도 숨이 가쁘다 허리띠 한 칸 때문에 콩당거리는 심장의 체면은 온데간데없다 계단은 높고 박동은 초침보다 빠르다 심장은 왼편에 있지만 반 뼘 정도 좌우로 움직일 때가 있다 *시집/ 치약을 마중 나온 칫솔/ 걷는사람 덧대어진 키스 - 정덕재 안경 쓴 가수 이상우가 '그녀를 만..

한줄 詩 2022.02.26

저물도록 - 박수서

저물도록 - 박수서 사는 일이 스스로 저버린 꽃밭에 앉아 꽃수를 놓거나, 수몰된 가계의 지붕 위를 날아오르는 텃새처럼 이앙기가 삼키고 뱉어버린 모판처럼 남겨진 추억에 우물쭈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미련 때문에 운명으로 떠나간 열망 저 편을 일몰이 긋고 간 심장의 붉은 두근거림은 저녁이 오면 해가 지는 일처럼 말없는 풍경이던지, 오래된 애인과 먹는 말 많은 밥상이면 좋겠어 제법 큰 눈이 내렸고 무거워진 가로수 쇠골처럼 내려앉은 나는 바라보는 일보다 지켜보는 일이 한창이야 앞질러 뛰어가는 세월의 넓적다리를 자세히 보면 알잖아 바라보는 눈은 때때로 삶을 짓눌렀던 단단한 근육을 먼저 알아보지만 지켜보는 눈은 오금이 저리도록 기어이 견뎌왔을 힘줄을 읽잖아 하여 지켜보는 눈은 사랑에 더 가까운 생명체야 눈 녹은 후 ..

한줄 詩 2022.02.26

양폭산장 바람 소리 - 김기섭

양폭산장 바람 소리 - 김기섭 물빛 고운 비선대를 떠나 천불(千佛)이 거처한다는 천불동으로 접어들었다. 귀면암을 지나 양폭산장에 도착할 무렵 대청에 낙엽이 다 졌다는 풍문이 들려왔고, 산장 앞 단풍잎들은 눈물겹게 빛났다. 만경대 꼭대기, 새벽부터 비가 뿌렸다. 공친 산행, 어두운 산방에 일없이 둘러앉아 소슬바람에 삐걱거리던 문소리와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면서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낮이 되면서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했고 살아남은 정현 형이 가수 장사익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별처럼 슬픈 찔레꽃 향기는 골짜기를 떠돌다가 가을비에 젖어 들고 밤새 바람이 세찼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밖을 나서는데 그새 가을이 다 갔는지 지천으로 깔린 붉은 잎을 차마 밟기 어려웠다. *시집/ 달빛 등반/ 솔출판사 꿈꾸는 수렴동 ..

한줄 詩 2022.02.23

덫 - 최백규

덫 - 최백규 밤새 덫에 뭉개져 있던 쥐를 끄집어낸다 손끝에 밴 피비린내가 지워지지 않는다 바람도 죽은 대낮에 커튼을 젖히다 돌아봐도 아무도 없다 암세포만 몸속에서 꾸준히 자라고 있다 빨래를 하고 밥을 차린다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 두렵지 않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평생 하청 업체에서 일했다 자존심을 죽이지 못해 늘 순탄치 못했다 용접 불꽃과 부딪치며 살아온 그들은 잘못 접합된 쇠처럼 어긋나 있었다 이제는 잘린 손가락이 약속을 쉽게 꺾어버릴 것 같다던 농담마저 우스워진다 팔에 새긴 이름을 긁적일 때마다 몸에서 고기 타는 냄새가 난다 욕실에서 혼자 등을 밀다 문득 이 계절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길거리 나무들도 병을 앓아 꽃에서 고름을 흘릴 것이다 피 흐르는 손목을 쥔 채 덫처럼 아무..

한줄 詩 2022.0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