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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감정 - 이설야

봄의 감정 - 이설야 봄날, 죽은 등을 갈아 끼운다 불 꺼진 영혼 다시 깜박인다 검은 나뭇잎들 흔들리는 봄의 가장자리 아침마다 죽은 문패들이 바뀐다 집을 버린 문패들은 옛 애인처럼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할 것이다 검은 유리는 계속 만들어지고 고양이들은 밤의 감정을 노래한다 서랍 속에서 잠자는 못쓰게 된 달력들 삼월에 내리는 눈처럼 봄을 망쳤던 시계들 몇 년째 죽지도 않는 어항 속 회색 물고기 같은 것들 봄날,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 과욕들 꽃피우려 해도 피지 않는 벼랑 아래로 자꾸만 굴러떨어지는 검은 나뭇잎들 아직 다 가보지 못한 당신 같은 언젠가 당신의 장례식 같은 봄의 감정들 봄날, 죽은 등을 갈아 끼워도 꽃이 피지 않는다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자세 - 이설야 동인..

한줄 詩 2022.06.20

내 주위를 가까이 - 김영언

내 주위를 가까이 - 김영언 공기 맑고 인적 드문 낯선 시골로 낭만적인 기분에 들떠 이사를 한 휴일 오후 구부정한 허리와 백발과 지팡이들 대여섯이 반가운 불청객으로 몰려왔다 금방 짜내어서 고소함이 들판을 휘감을 듯 끈끈한 들기름 한 병과 농약 안 주고 하우스 안에서 가족용으로 기른 고춧가루 한 봉지와 오래 두어도 단단하고 맛이 순하다는 토종 마늘 한 접과 텃밭에서 가꾼 꾸밈없는 빛깔의 청치마 상추 서너 포기와 속살이 호박처럼 정겹게 노랗다는 고구마 한 상자가 예고도 하지 않은 집들이를 예고도 없이 왔다 그들은 내 주를 가까이하라고 엄숙한 노래를 불러주고 돌아갔는데 나는 송구스럽게도 그들의 부탁을 다 들어주지는 못하고 다만 내 주위를 가까이하겠노라 기꺼운 다짐을 하였다 첨탑 위 십자가가 아담하게 걸려 있는..

한줄 詩 2022.06.20

없는 사람 - 박용하

없는 사람 - 박용하 그가 침대에 누워 있다는 전화가 여름 빗소리의 밤을 뚫고 쳐들어온다. 죽기 전에 봐야 하지 않겠어요. 형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네 목소리가 거세지는 빗방울과 연합해서 밤의 바닥을 열혈로 두드린다. 두 달 전 그를 바닷가 병원에 입원시키고 얼른 나의 일상으로 돌아와 연락 없길 바라며 지냈다. 두 번이나 옮겨간 병원에서 본 그는 산소마스크를 하고 있었고, 저럴 바엔 하루빨리 세상 밖으로 나가기를 애인의 몸을 원하듯이 간절히 원했다. 거친 숨을 내쉬는 그의 사지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짓도 보태지 않고 서둘러 내 그림자를 데리고 밤을 달렸다. 그를 보고 온 다음날 그가 갔다는 기별이 왔다. 그는 나하곤 상극이자 한 지붕 밑에서 공기를 마실 수 없는 사이. 그는 내 피의 반대편 반쪽. ..

한줄 詩 2022.06.19

이유 없는 행복한 이유 하나 - 황현중

이유 없는 행복한 이유 하나 - 황현중 오늘 또다시 길을 떠나는 이유는 이유 없이 떠나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부질없는 되풀이라 하여도 부질없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헛바퀴 돌리는 헛일이라 하여도 늘 제자리인 줄 알면서도 늘 제자리걸음으로 걸음걸음 신나는 순간순간 빛나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비틀거려도 주저앉지 말아야 할 비틀거리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 해를 붙들고 빈 가지에 젖은 바람을 흔들며 흔들리는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은 흥분보다 무엇이 된 기쁨보다 이유를 유혹하지 않는 이유 없는 행복한 이유 하나 만드는 것이다 *시집/ 너를 흔드는 파문이 좋은 거야/ 그림과책 지천명(知天命)을 위한 기도 - 황현중 수없이 떠나려 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떠나지..

한줄 詩 2022.06.18

직진금지 - 김명기

직진금지 - 김명기 직진금지 표지판 앞에서 그대로 내달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고 살라고 말했지만 쳐다본 곳까지 오르지 못한 채 엄나무뿌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긴 시간 아버지는 세 시 방향 나는 아홉 시 방향으로 꺾어져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간혹 여섯 시 방향을 향해 돌아섰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혈연의 회한을 확인할 뿐이었다 생각과 몸은 바뀌어 갔으나 열두 시 방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아버지가 생의 간판을 접고 폐업하는 순간에도 나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경험의 오류를 너무 확신했다 어쩌다 녹슨 족보에서나 쓸쓸하게 발견될 이름들이 숱한 금기 앞에서 내버린 시간 껴안지도 돌아보지도 못한..

한줄 詩 2022.06.18

식물 합니다 - 김륭

식물 합니다 - 김륭 식물 합시다, 이 말을 자전거에 태우고 달리면 변한다. 아파트에서 요양병원으로 주거지를 옮긴 엄마의 자서전엔 그렇게 나온다. 식물은 꼬리 대신 머리를 흔든다. 입을 발밑으로 떨어뜨려 하늘이 내려오길 기다리는 자세, 가만히 누워만 있는 당신을 내려다보면 죽음을 초월해 한 번 더 사는 기분. 잘 팔리는 시집 제목에 목줄을 묶어 바람 쐬러 간다. 없는 애인이 따라나설 때도 있지만 아주 드문 일이다. 잘생긴 이팝나무 하나 골라 밤에게 이야기하듯 볼일을 보다가 문득 나를 데려오지 않았단 생각을 할 때도 있다. 미쳤나 봐, 언제까지 머리를 꼬리처럼 흔들어야 되는 걸까. 잘 팔리는 시집 속에는 뿌리를 꼬리로 사용해 춤을 추는 부족들이 산다고 했다. 땅만 보고 걷다 보면 가까워지는 나무의 잠, 속..

한줄 詩 2022.06.17

소문처럼 너는 가고 - 강회진

소문처럼 너는 가고 - 강회진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소문처럼 들었다 마치 모두가 잠든 밤 너는 폭설이 내린 시베리아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가 버렸나 급하게 가느라 맨발로 떠난 것 같아 생각하는 나는 손발이 시렸다 가만히 일어나 오래전 누군가에게 받은 녹슨 반지를 찾아 손가락에 걸어보았다 마치 이제야 약속이 기억 난 듯 이제 죽고 없는 너와 반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지키지 못한 어떤 약속 하나가 생각났을 뿐 먼 먼 몽골, 전생에 우리는 다섯 번 보다는 더 만났겠지 그러니 여섯 번째 전해들은 너의 마지막 소식은 죽음 누군가의 죽음을 파먹으며 하루를 견딘다 마치 지키지 못한 약속은 차라리 잊는 게 좋다 그러니 이제 서로 안녕 *시집/ 상냥한 인생은 사라지고/ 현대시학사 나는 여러 번 죽고 싶다 - 강회진 초승달..

한줄 詩 2022.06.17

즉석복권 - 박은영

즉석복권 - 박은영 가능성은 긁지 않을 때 일어나는 사건 우리는 서로의 등을 긁어 줬다 꽝인지, 행운인지 손 닿지 않는 곳을 긁어 주는 사이가 되었지만 잔소리를 하며 바가지를 긁을 때가 많았다 긁을수록 앞날은 보이지 않고 마른 등판만 눈에 들어왔다 일확천금의 불가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눈으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가장 쉬운 일 긁지 않고 그대로 두는 편이 나을 뻔했다 우리는 꽝이란 것을 안 뒤 즉석요리를 먹듯 뭐든지 쉽게 화를 내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찢어지자며 인성을 높였다 어떤 날은 긁다가 혈흔을 남기기도 했다 손톱은 피를 먹고 자랐다 우리의 관계에서 남은 건 피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때, 등골은 물론이고 이마와 미간, 손등,,,,, 온몸은 그야말로 손톱자국으로 이글거렸다 그래도 한 가지 우리가 낳..

한줄 詩 2022.06.16

알래스카 개구리 - 류시화

알래스카 개구리 - 류시화 알래스카의 숲 개구리는 무슨 이유로 그곳에 살게 되었는지 개구리 자신도 알지 못하고 원주민들도 잘 모르지만, 달이 여섯 번 차고 기우는 긴 겨울 동안 몸이 완전히 언 상태로 변한다 끊임없이 내리는 눈 속에서 호흡이 정지하고 심장 박동이 멈추고 혈액 순환도 중지된다 뇌가 활동을 중단해 발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다 그렇게 초록색 얼음 덩어리가 되어 기다리다가 마침내 봄이 오면 몇 분 안에 온몸이 해빙되고 폐와 심장이 정상으로 돌아와 가까운 연못에서 다시 삶을 시작한다 그 빙결의 시간 동안 심장 세포만큼은 살아 있어 날이 따뜻해지면 언제든 부활이 가능하다 얼어 죽는 것이 아니라 얼어서 살기로 결심한 개구리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외딴 별에 와서 온 존재가 얼어붙어도 온 존재로 심장 ..

한줄 詩 2022.06.16

불량 판결문 - 최정규

나는 직업 뒤에 사師,士,事)자가 들어 있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의사, 변호사, 판사 등 사회적으로 저명 인사에 속하는 사들을 싫어 한다. 예전에 지인의 소개로 변호사를 소개 받은 적이 있다. 내가 법률 도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닌 사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처음 마주쳤을 때 좋은 인상을 받았으나 변호사라는 소개에 호기심이 뚝 떨어진다. 아니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말이 더 맞겠다. 시험 잘 치는 그 좋은 머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욹어 먹었을까. 이 생각을 했다. 나는 처세술이라 할 수 있는 인맥 찾기가 늘 이런 식이다. 알아 놓으면 나중 도움 받을 수 있겠구나 그런 거 자체가 없다. 물론 변호사 출신으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거나 활동가로 일하는 사람을 존경한다. 내가 이 책을 읽게 된 것도..

네줄 冊 2022.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