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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변호사 - 송경동

노동자 변호사 - 송경동 민주노총 구석 자리 하나 얻어 노동법률원을 처음 열었을 때 노동자들이 와서 "법에 저촉되지 않고 싸울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물으면 이 사람은 제대로 싸울 수 없겠구나 했다 "합법적으로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물으면 노동자들이 법으로 싸워 이길 길은 없지요 솔직히 말해주었다 기존의 법을 뛰어넘어 새로운 법을 만들려고 싸울 때만이 비로소 노동자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간명한 사실밖에 변호할 게 없었다 한다 *시집/ 꿈꾸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창비 토대 - 송경동 사회운동 한 삼십년 쫓아다니다보니 이젠 조금 알겠다 노동자 민중 정치를 하겠다는 이들 중에도 나는 대장만 하고 싶어요 하는 이 많다 혁명을 이야기하며 권력을 수단이나 독점으로 사유하는 이 '나'나 '우리'가 ..

한줄 詩 2022.07.03

낙원으로 가는 인생 - 박판식

낙원으로 가는 인생 - 박판식 골목 벽에는 낙서가 가득하였다, 마담 k는 하루하루 희망 없는 날을 보냈고 인생이 잘 안 풀리는 이유를 몰랐고 물론 나도 몰랐다 하늘은 푸르다,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알약들이 목을 넘어가고 나는 꿈속에서 시원하게 군복을 벗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면 너는 죽을 거야 니 무서운 소원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너는 사람대접 못 받을 걸 네 가닥으로 찢어진 마음이 마취에서 풀려나 통증이 밀려왔다 니 아버지는 늙은 탈영병, 어둡고 께름칙한 깨달음을 어린 나에게 주었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 이 쉬운 질문 앞에 내가 날마다 엎드려 얼마나 절망하는지 너는 모르고 그렇다고 과장할 필요는 없고 *시집/ 나는 내 인생에 시원한 구멍을 내고 싶다/ 문학동네 나는 말한다 - 박판식 인생은 ..

한줄 詩 2022.07.03

청춘 - 김태완

청춘 1 - 김태완 끝이 정해진 그리운 한때가 될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알고 있어서 지나간 봄의 또 다른 이름 내가 작곡한 선율에 몸을 기대어 노래가 되는 공정을 지나 오래된 이야기가 작사되는 먼 훗날의 완성작 청춘이 구슬픈 역설의 아픔은 푸르지 않은 한밤의 꿈처럼 속절없이 지나가는 내가 모르는 계절 그 시절의 응어리가 온통 내 생을 주무르기 때문이다 *시집/ 다음이 온다/ 이든북 청춘 2 - 김태완 아찔한 어둠만 가득하였다 내일은 없고 죽어가는 것에 대해 몇 번의 계절을 지나 가고 몇 개의 산을 넘고 사막의 한가운데를 서성이다가 가끔 만나는 꽃길에 취해 안주하다가 물이 되어 나를 놓아버리기도 했다 옆을 바라볼 겨를도 없이 비슷한 사람들의 행동을 따라하는 형식이 전부였다 할까 한 시절을 만난다는 건 ..

한줄 詩 2022.07.02

흉터의 문장 - 류시화

흉터의 문장 - 류시화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시집/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

한줄 詩 2022.07.02

손톱달 - 심재휘

손톱달 - 심재휘 저녁볕을 옆으로 조금 밀어두고 그늘에 앉으면 마루 위의 그늘은 편지지를 깐 듯해서 편지를 쓰는 척 손톱을 깎습니다 당신을 떠나보내고 돌아온 그 달밤에도 빈방에서 손톱을 바싹 깎았습니다 오늘도 당신은 돌아오지 않으니 어느덧 보름이 지나고 나는 웃자란 손톱을 깎습니다 그리고 오늘 밤이 질 무렵은 그믐달이 뜰 차례 바싹 깎은 손톱으로 한동안 살은 시리겠습니다 그믐달같이 드러난 붉은 살은 차차 자라는 손톱 밑 어둠 속으로 들겠습니다 그믐은 조금씩 밝음으로 가겠습니다 오늘도 볕까지 튀어가지 못한 손톱들이 그늘에 삐뚤삐뚤 뭔가를 적는 것도 같았는데 그 편지는 잘 쓸어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그런데 어찌하겠습니까 자라는 손톱을 깎을수록 나의 달은 차지 못하여 당신이 돌아오는 길은 어둠에 묻힙니다 *..

한줄 詩 2022.07.01

민들레의 이름으로 - 박은영

민들레의 이름으로 - 박은영 내 몸은 감옥이다 문밖을 나서는 일이 이리도 힘들다는 걸 봄이 되고 알았다 면회 오는 이가 없어, 나는 혼자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종이학을 접으며 차디찬 바닥을 떠나리라 악착같이 살았다 내 몸엔 수많은 담장이 있다 절망이 있다 아비는 술을 마시고 어미는 새벽기도를 나가고 그대들의 그늘을 벗어나는 일이 죄목이 되었다 종이는 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다 꿈을 접는 건 가석방 없는 날들을 버티게 해 주었다 민들레의 이름으로 지하 계단의 무수한 턱을 내려가 무인점포를 접고 생을 접고, 내 몸이 부서지는 날 나는 천 마리의 학처럼 날아오를 것이다 *시집/ 우리의 피는 얇아서/ 시인의일요일 큐리오시티* - 박은영 나는 무거운 자아를 가졌다 중력을 거스르는 새벽 무게를 버린다 한곳으로..

한줄 詩 2022.07.01

뒤뜰 - 편무석

뒤뜰 - 편무석 안타깝게도 떠내려가야 했던 내가 타고 온 것은 눈물이었다 몇 차례의 정착지에서 덜컹거리며 말라 죽는 나를 던졌고 물수제비 뜨며 한 번만 더 이번이 마지막, 마지막이야 아슬히 우는 버릇이 늘 떠나는 이유였다 핏발 선 눈에 울음이 장작처럼 쌓인 종유석이 전봇대로 서서 골고루 빛을 뿌렸지만 정작 가장 어두운 말뚝이었다는 증언들 이따금 소소한 말들로 쉽게 큰 말을 지우는 재주는 참담하고 당혹스러운 가발이었고 말을 벗어 두고 사라졌어도 누구나 오랫동안 쓸 수 있는 신통한 유혹이었다 성(城)은 성(性) 뒤뜰 어떤 날은 슬픔을 쪼그리고 앉아 빈 병을 불면 뒷문 앞으로 여우가 색소폰 닮은 울음을 닦아 보낸다는 소문을 더러워해야 하는 등불은 슬프고 안타까워 콜록거렸고 목에선 그을음만 끓었다 신비에 가깝게..

한줄 詩 2022.06.30

다시 세상을 품다 - 홍신선

다시 세상을 품다 - 홍신선 간밤 토막잠 밀어내 놓고 새벽 내내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뒹굴다 보면 끝내 분별 하나가 시오 리 밖쯤 가던 발걸음 되돌려 달려온다. 갈 때는 갈 때고 다시 돌아오는 발걸음이 빠르다. (아암 그렇지 그랬었구나) 문득 내 머리맡이 환해진다. 그렇게 나이 들수록 속 깊이 마음을 어르고 달래며 다듬고 추슬러 아니 돌려서 생각을 자주 바꾼다. 그럴 때마다 때 없이 서리 묻은 세월의 언저리가 더 시려 와도 밤새 멀찍이 밀쳐 두었던 이 산골 세상을 나는 다시 품에 안을 수밖엔·····. *시집/ 가을 근방 가재골/ 파란출판/ 2022 내 공명(功名)은 - 홍신선 갓 벼린 닻을 내린 닻별인가 입식 다섯을 세운 금동관인가. 빗발이 석축 돌에 옥쇄하듯 온몸을 깨어 무늬를 짓는다. 저 무늬 하나..

한줄 詩 2022.06.29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 - 문신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공단 지대를 경유해 온 시내버스 천장에서 눈시울빛 전등이 켜지는 저녁이다 손바닥마다 어스름으로 물든 사람들의 고개가 비스듬해지는 저녁이다 다시,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는 저녁이다 저녁에 듣는 누가 아프다는 이야기는 착하게 살기에는 너무 피로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문득 하나씩의 빈 정류장이 되어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내버스 뒤쪽으로 꾸역꾸역 밀려드는 사람들을 보라 그들을 저녁이라고 부른들 죄가 될 리 없는 저녁이다 누가 아파도 단단히 아플 것만 같은 저녁을 보라 저녁에 아픈 사람이 되기로 작정하기 좋은 저녁이다 시내버스 어딘가에서 훅, 울음이 터진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을 저녁이다 이 버스가 막다른 곳에서 돌아 ..

한줄 詩 2022.06.29

장마철 - 최백규

장마철 - 최백규 정학과 실직을 동시에 치르고도 여름은 온다 터진 수도관에서 녹물이 흐르고 장롱 뒤 도배된 신문지로 곰팡이가 번지다 못해 썩어들어간다 기름때 찌든 환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습기가 자욱하다 깨진 유리병 옆에 버려둔 감자마저 싹을 흘리고 있다 벌겋게 익은 등 근육 위로 욕설을 할퀴고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다가 마주 보던 사람이 떠올라서 밀린 급여라도 받기 위해 진종일 공사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전신주에 기대앉아 신발 밑창으로 흙바닥의 침을 짓이기고 불씨 죽은 드럼통이나 해진 목장갑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한다 숨이 차도록 구름이 낮다 신입생 시절 교정에 벽보를 바르던 선배들은 하나같이 폭우를 맞은 표정이었다 화난 얼굴로 외치는 시대와 사랑이 고깃집이나 당구장에 널려 있었고 나는 무단횡단할 때보다..

한줄 詩 2022.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