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봄의 감정 - 이설야

마루안 2022. 6. 20. 22:31

 

 

봄의 감정 - 이설야


봄날,
죽은 등을 갈아 끼운다

불 꺼진 영혼 다시 깜박인다
검은 나뭇잎들 흔들리는 봄의 가장자리

아침마다 죽은 문패들이 바뀐다
집을 버린 문패들은 옛 애인처럼
그렇게 멀리 가지는 못할 것이다
검은 유리는 계속 만들어지고
고양이들은 밤의 감정을 노래한다

서랍 속에서 잠자는 못쓰게 된 달력들
삼월에 내리는 눈처럼 봄을 망쳤던 시계들
몇 년째 죽지도 않는 어항 속 회색 물고기 같은 것들

봄날,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들, 과욕들
꽃피우려 해도 피지 않는
벼랑 아래로 자꾸만 굴러떨어지는 검은 나뭇잎들
아직 다 가보지 못한 당신 같은
언젠가 당신의 장례식 같은
봄의 감정들

봄날,
죽은 등을 갈아 끼워도
꽃이 피지 않는다


*시집/ 내 얼굴이 도착하지 않았다/ 창비


 

 

 


자세 - 이설야

 

 

동인천역 지하상가 계단 아래

모자를 거꾸로 붙잡고 든 사내

바닥과 하나된 자세로 엎드려 있다

 

누군가 동전을 넣자

모자 속으로 다보탑이 사라졌고

누런 벼 이삭은 고개를 숙인 채 떨어졌다

또 누군가 두루미가 새겨진 동전을 넣자

사내의 손이 날아가는 두루미 목을 잡고

주머니 속으로 얼른 집어넣었다

 

태양이 태양을 벗어나는 오후

사내는 모자를 눌러쓰고 지상으로 나와

거미줄처럼 이어진 밥줄 끝에 매달렸다

주먹밥 두개와 국 한그릇 받아 들고 구석으로 들어갔다

 

회색 비둘기들이 광장에 모여

별들이 엉키는 저녁까지

제 가슴의 깃털을 뽑으며 이슬방울을 마신다

 

밤의 밖으로 밀려난 그림자들

슬픔의 동업자들

서로 떠나온 역을 등지고 앉아

구부러진 그림자를 파먹는 그림자들

 

빛이 모두 빠져나간 원형 광장에서

각자의 자세로 영혼을 재운다

 

매일 다른 밤이

같은 내일을 데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