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직진금지 - 김명기

마루안 2022. 6. 18. 21:45

 

 

직진금지 - 김명기


직진금지 표지판 앞에서
그대로 내달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고
살라고 말했지만
쳐다본 곳까지 오르지 못한 채
엄나무뿌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긴 시간
아버지는 세 시 방향
나는 아홉 시 방향으로 꺾어져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간혹 여섯 시 방향을 향해 돌아섰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혈연의 회한을 확인할 뿐이었다
생각과 몸은 바뀌어 갔으나
열두 시 방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아버지가 생의 간판을 접고
폐업하는 순간에도 나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경험의 오류를 너무 확신했다
어쩌다 녹슨 족보에서나
쓸쓸하게 발견될 이름들이
숱한 금기 앞에서 내버린 시간
껴안지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너무 오래 중심을 잃고 살았다

 

 

*시집/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춘양(春陽) - 김명기


귀엣말로 들려주던 곳을 지난다
마을로 내려서는 이정표를
일없다는 듯 지나 한 모퉁이 돌아
한참을 더 가서 차를 세운다

세상에는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말들이 너무 많은데
아름다워서 하냥 따뜻했던 말은
왜 잊는 법을 모르나

어느 해 물드는 가을 나무 아래서
오래된 관공서 칠 벗겨진 담벼락
얘기를 들려줄 때 그래도 이름만큼은
자꾸만 당기는 핏줄 같아 설렌다며

쓸어 넘기는 머리칼 속 흰머리가
그 담벼락같이 쓸쓸해
그곳 생각이 난다던 당신
녹슨 관악기 파열음처럼
가끔 몸속에선 그 말이
삐걱대는데 아직도 핏줄 같던 이름이
설렐 때가 있는지

잊고 살아도 잊히지 않듯
아무 일 없는 듯 지나쳐도
아무 일이 될 때가 있지
그저 봄볕 아래를 잠시 지나왔을 뿐인데
삼키지도 뱉지도 못한 채 어긋나 버린
먹먹한 마음처럼


*경북 봉화군에 속한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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