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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도 긴 세월 앞에 부질없어 - 부정일

인연도 긴 세월 앞에 부질없어 - 부정일 빼빼로 데이라는 열하루, 팔십 난 옥금이 누님이 파크골프 치러 회천 구장에 왔네 초이튿날 동갑 영감 먼 길 보내고 벌써 맘 추슬러 평소처럼 곱게 차려입고 공 치러 왔네 있는 듯 없는 무심한 빈자리 오래 산 날들에 묻혀 사소한 일은 아니었지만 공 치러 왔네 폐암으로 먼 길 떠난 영감이야 교장으로 퇴직한 몸이었으니 애들 데리고 뭍으로 수영여행 떠난 것만 같고 안부를 묻는 빈말들이 더 야속한 오늘 같은 날은 일부러 부침개라도 부쳐야 할 것 같은데 한때는 영감의 퇴근을 기다리며 저녁을 준비할 때 분홍 빛깔 떨림 같은 것도 가물가물하니 가야 하는 길, 나 두고 여행 가듯 떠난 사람 인연도 오래 산 세월 앞에 부질없어라 운동 삼아 매일 치던 파크골프도 두 달 넘겨 왔으니 공..

한줄 詩 2022.06.28

깻잎 투쟁기 - 우춘희

예전에 제주 둘레길을 걸은 적이 있다. 근 8개월 동안 다섯 번에 걸쳐 며칠씩 걸어 둘레길 완주를 했다. 제주까지는 비행기였지만 이후는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해 둘레길을 걸었다. 그때 길에서 만난 제주의 농작물 밭을 수없이 봤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 대부분이 외국인이었다. 말을 걸어 봐서가 아니라 외모만 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시종 자기들 말로 웃고 떠들면서 일을 했지만 그들의 노동이 안쓰럽기도 했다. 누구는 저렇게 뙤약볕에서 고된 일을 하는데 나는 한가하게 둘레길을 걷고 있다는 미안함도 들었다. 이 책은 우춘희 선생이 두 달간 실제 깻잎을 따는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한 경험을 쓴 것이다. 유독 캄보디아 사람들이 깻잎 농장에 많이 일한다고 한다. 어디 깻잎 농장뿐이던가. 시골 농부들 말에 의하면 외국인..

네줄 冊 2022.06.26

진정한 멋 - 박노해

진정한 멋 - 박노해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사치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위해 나머지를 기꺼이 포기하는 것 제대로 된 사치는 최고의 절약이고 최고의 자기 절제니까 사람은 자신만의 어떤 멋을 간직해야 한다 비할 데 없는 고유한 그 무엇을 위해 나머지를 과감히 비워내는 것 진정한 멋은 궁극의 자기 비움이고 인간 그 자신이 빛나는 것이니까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느린걸음 내가 죽고 싶은 자리 - 박노해 사람들은 흔히 말한다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그러나 실은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 모두는 결국 죽음을 향해 걷고 있다 언젠가 어느 날인가 죽음 앞에 세워질 때 나는 무얼 하다 죽고 싶었는가 나는 누구 곁에 죽고 싶었는가 내가 죽고 싶은 자리가 진정 살고 싶은 자리이니 나 지..

한줄 詩 2022.06.26

쌍무지개 피던 날 - 김용태

쌍무지개 피던 날 - 김용태 먼 바다를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추억마저 빈곤했던 유년시절 물사마귀처럼 불거진 일 하나 젖은 얼룩으로 번져 큰물 지던 날 신던 것보다 손에 들고 다녔던 적이 많았던 고무신, 그 한쪽을 속절없이 떠내려 보내고 아버지 눈을 피해 어머니 머리에 인 보리쌀 닷 되, 그 속엔 주린 당신의 여러 끼니와 긴 여름 해 하루치의 노동이 고스란히 똬리로 앉아 남아 구실을 할 수 없던 다른 한쪽을 어떻게 하였는지는 이제 떠오르지 않고 비 갠 서쪽 하늘 위로 쌍무지개만 울멍울멍 피어 올랐던 기억 그날 밤 잠속에서 나는, 어머니의 마른 울음 뒤로 떠내려 보낸 고무신 찾아 먼 바다로 가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릅니다 *시집/ 여린히읗이나 반치음같이/ 오늘의문학사 면회 - 김용태 가끔씩 다음 생이라도 다녀..

한줄 詩 2022.06.25

어둠이 드는 저녁 들판에 서서 - 류흔

어둠이 드는 저녁 들판에 서서 - 류흔 이런 저녁은 아름다움이 적절해서 벌판에 있는 모두가 안심이다 석양이 점차 물크러지고 저들끼리 깔깔대던 새들은 도처에 찌그러졌다 샤워를 하듯 어둠이 머리 위에서 솨 쏟아진다, 나는 꼴려서 하마 터면 옷을 몽땅 벗을 뻔했지 계절을 강조하며 나무들도 벗는다 그들 아래로 걸어가면 다투어 잎을 던지는 모양이 탁 탁 내게 침을 뱉는 것 같아 마뜩찮고 기분 엿같다 이런 저녁에 검어지는 들판으로 드는 것은 저녁밥이 없는 집으로 터벅 터벅 걸어가는 것과 같겠지만 이만한 어둠이면 족해서 나는 갑자기 기분이 째진다 뒤집어질 만큼 좋아서 어둠마저 뒤집힌다면 아침은 오겠지, 내가 절대적으로 싫어하는 빛이 오겠지, 무지하게 눈부신 애인의 유방 가운데 올연한 갈색의 단단한 어둠을 보겠지 나는..

한줄 詩 2022.06.25

마수걸이 - 서화성

마수걸이 - 서화성 오래전 일이 되어버렸다 첫날 새벽에 나무껍질 같은 아버지 등을 밀어줄 때 시원하게 빨대를 꽂아 요구르트를 마실 때 집에 가다 파전에 막걸리 한잔할 때 첫날 새벽에 나무뿌리 같은 엄마와 고성행 첫 버스를 탈 때 먼지가 앉은 어깨를 딱딱 말없이 털어줄 때 유난히 어둠에 가린 흰머리가 깜박거릴 때 보따리를 이고 저만치 앞서갈 때 주름진 아버지가 싫어 등을 피나도록 밀은 적이 있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픔을 참는지 어깨를 들썩일 뿐 주름을 밀면 주름이 펴지는 줄 아닌 나이가 지나 조금만조금만 더 했지만 더 이상은 아버지와 목욕탕에 갈 수 없었다 아직은 어둠이 사라지기 전까지 시간이 있었다 고양이 세수를 시키고 길을 놓칠까 봐 내 손을 꽉 잡았다 알 수 없었고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을 가리는 무언..

한줄 詩 2022.06.22

지진처럼 꽃피다 사라진 - 성은주

지진처럼 꽃피다 사라진 - 성은주 우린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버려진 상처의 속도만 기억할 뿐 출발선에서 신발을 챙기고 오래된 지도를 꺼내 보았는데 발자국으로 표시된 자리마다 파도가 출렁인다 외로운 물고기들이 서로 몸 비빌 때 잃어버린 부표가 떠오른다 지구 어딘가 찍힌 발자국으로 아무가 아무에게 아무를 아물게 하는 저녁 모퉁이는 잡히지 않고 낙서 가득한 얼굴들만 가득하다 읽어 내지 못한 감정에 다시, 발밑에서 꽃들이 진다 손잡이 없는 문을 열 때마다 당신의 어딜 만져야 할지 어제부터 회전목마는 멈추지 않고 대화가 필요한 밤에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신발만 가득하다 때론 내가 아닌 다른 누구이고 싶을 때가 있다 종이에 글씨를 눌러쓰면 꾹꾹 누르던 표정이 떠올라 공책을 덮고 공책은 당신을 지우고 또 지우다..

한줄 詩 2022.06.22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 하상만

하상만 시인이 새 시집을 냈다. 출판사 걷는사람에서 좋은 시집을 많이 낸다. 여기서 나온 시집은 어느 정도 품질(?)이 보증되기에 한 권도 빼지 않고 들춰본다. 그렇다고 모든 시집을 끝까지 읽는 것은 아니다. 몇 쪽 들추다 만 시집이 더 많다. 코드가 맞는 시인은 한 두 편만 읽어도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시집 구입 방식은 출판사 평만 믿고 덮어 놓고 사는 것이 아니라 직접 서점에 나가 실물을 보고 산다. 이 시집도 그 중의 하나다. 이 책 는 하상만의 세 번째 시집이다. 이전의 시집을 읽었으나 그리 눈여겨 보지 않았는데 이번 시집에서 완전 빨려 들었다. 시가 완전 물이 올랐다고 해야 하나? 이래서 그 시인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권의 시집을 내 이후라고 생각한다. 하상만 시인은 고등..

네줄 冊 2022.06.21

다른 바람이 - 변홍철

다른 바람이 - 변홍철 골목 한쪽 꽝꽝 울리던 능소화 모가지들이 뚝뚝 떨어졌다 그들의 말을 채 알아듣기도 전이었다 장마가 퍼붓기 전, 예비검속을 피해 몸을 숨기듯 도피가 아니라 차라리 환멸과 단절하듯 이것은 하나의 의지, 무리 지어 피었어도 언제나 고독했다고 담장 이쪽과 저쪽 사이에 중립지대는 없다고 무심한 발길에 차이기 전에 그중 몇 송이라도 추념 가득한 책장 한쪽에 꺾어두지 못한 것을 서러워 말자 짙은 초록의 허공, 흔들리는 역사의 넝쿨을 차라리 이 시각, 응시할 일 다른 바람이 동네 이곳저곳을 탐문 중이다 *시집/ 이파리 같은 새말 하나/ 삶창 꽃길 - 변홍철 바람 부는 대로 떠밀려도 어느 구석엔가 겹겹이 쌓여 이어지는 길, 다시 바람길 꽃잎이 하얗게 떨어진다 대출이자 독촉처럼 검은 나무 뒤로 눈부..

한줄 詩 2022.06.21

흐르다 멈춘 곳에 섬이 있었다 - 고성만

흐르다 멈춘 곳에 섬이 있었다 - 고성만 내가 한 마리 심해어로 태어나 멀어버린 눈 대신 알록달록 지느러미 흔들어 너에게 다가가고 있을 때 세이렌에 홀려 자욱한 안개 속 방향을 잃었을 때 흐르다 멈춘 길 끝 섬이 있었다 돌계단 돌아 올라 도착한 벼랑 밤새 탑 지키던 등대지기는 깊이 잠들었다 이마에 훤한 불 켜고 뱃길 인도하는 일이 저리 고단한가 검은 여 혹은 갯바위 근처 지나 너 찾아가는 일도 그러하다는 것을 뜨겁게 떨군 눈물, 짜디짠 맛을 보고서야 알게 되듯이 *시집/ 케이블카 타고 달이 지나간다/ 여우난골 파다하다 - 고성만 저수지 뒤쪽 노을이 붉다 노랗고 빨간 지붕 너머 지류의 끝에서 흘러내리는 저녁은 교차로에서 어떤 길로 갈까 망설인다 너무 늦지도 이르지도 않은 시간 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한줄 詩 2022.0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