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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하늘을 보아 - 박노해 시집

박노해 시인이 신간 시집 를 냈다. 이전의 시집이 언제 나왔나 봤더니 2010년이다. 그 시집도 12년 만에 냈다던데 다시 12년 후에 새 시집이 나온 것이다. 이전 시집처럼 이 시집도 성경처럼 두껍다. 500 페이지가 넘는다. 실제 그의 시집은 성경 읽는 것처럼 곁에 두고 틈틈히 읽어야 한다. 단숨에 읽더라도 질리지는 않는다. 노동시를 많이 썼던 초기 시가 다소 압박감을 줬다면 요즘 시는 힘을 많이 뺐다. 그래서 예전 시에 비해 훨씬 부담 없이 읽힌다. 그렇다고 무게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의 시가 치밀한 문학적 구조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기에 머리 쥐어 뜯으며 읽을 필요는 없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아! 이런 생각 때문에 시인은 다르구나"를 중얼거리게 된다고 할까. 시인은 시대에 맞서 싸우다 사..

네줄 冊 2022.06.05

막차는 오는데 - 부정일

막차는 오는데 - 부정일 하필 전염병으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할 때 벚꽃 흐드러지게 핀 길 따라 간 요양병원은 잠시 몸 추스를 동안 머물 곳인 줄 알았네 애들 한번 못 보고 요양병원에 누워만 있다가 꿈인 듯 순간에 찾아온 막차에 올라 도착한 곳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가 잠든 가족묘지 한 자리를 택해 누우니 애들이 곡을 하네 손자는 훌쩍이고 아내는 멍하니 보네 어릴 적 병치레로 애먹인 셋째 딸이 슬프게 우네 누구에게나 결국 막차는 오는데 필십 중반 이미 볼 장 다 보았는데 무슨 미련이 남아 더 보려고 하겠는가 아내여 먼저 와 자리 잡고 있으니 조금 있다 오시게 덜컹거리며 장의업체 포클레인이 가네 모두가 모여 차례로 막잔 올리며 절을 하네 봉긋봉긋 봉분들 팔 벌려 나란히 선 가족묘지에 나 홀로 두고 늙..

한줄 詩 2022.06.02

못 견딜 고통은 없어 - 박노해

못 견딜 고통은 없어 - 박노해 젊어서 못 견딜 고통은 없어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의식을 잃거나 죽고 마니까 살아있다면 견디는 거지 고통에도 습관의 수준이 있어 그러니까, 고통을 견뎌내는 자기 한계선을 높여 놓아야 해 평탄한 길만 걷는 자들은 고원 길이 힘들다 하겠지 젊은 날엔 희박한 공기 속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봐야 해 더 높은 길을 탐험해 본 자에게 고원쯤은 산책 길일 테니까 자신의 두 발로 생존 배낭을 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묵직이 올라서던 심장이 터질 듯한 그 벅찬 길이 자긍심이 되고 그리움이 될 테니까 사람들은 정작 자기 시대가 얼마나 좋은 시대인지를 모르지 나만 고통스럽고 나만 불행하고 나만 억울하다고 체념하지 인간에게 있어 진정한 고통은 물리적 몰락이나 통증이 아냐 심리적 몰락이고 ..

한줄 詩 2022.06.02

그림자의 변명 - 우혁

그림자의 변명 - 우혁 조금 덥다 싶은 날이면 허투루 흩어놓은 듯한 철자들을 찾아보아요 성급할 것도 없는 오후, 오전부터 쌓인 별은 자신의 퇴적층에서 당신의 눈을 화석처럼 발견하곤 할 거예요 눈물을 닦으라던 닦으라고 애원하던 오래된 노랫말은 '무엇인가 꽉 찬' 지면 위에 라벨처럼 붙어 있어요 그러다 당신은 무심결에 툭 치고 지나가기도 해요 몸 바뀐 그림자 난 사랑을 그렇게 부르곤 했어요 없음에 대한 기록들 있어 본 적이 없는 운명들을 종종 잘못된 발음으로 발화해요 괜찮아요 오자를 찾는 일이 아니에요 있어달라는 애원이었죠 이럴 때 흘리는 눈물은 제법 알 굵은 호박색이랍니다 *시집/ 오늘은 밤이 온다/ 삶창 바람 - 우혁 -몸 밖의 모든 것은 푸르다 돌아올 때는 언제일지 몰라도 돌아올 곳은 여기밖에 없네 눈..

한줄 詩 2022.06.01

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말없이 살아가는 것 - 최규환 나무 그늘에 앉아 나무가 하는 말을 듣자니 아무 말도 없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었을 때 무수하게 쏟아내던 말이 있었습니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받아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속으로만 간직해 두기를 바랐었는데 일곱 번을 두드려도 문이 열리지 않아 담기 힘든 말로 인해 무너지는 자구책을 써야만 했습니다 나무그늘에 앉아 나방의 성충이 나무의 살을 깎아내는 걸 보고 있자니 나무는 상처를 키워내는 일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지면을 버리고 짐을 챙겨 한때 수몰지구였던 근처에 가서 잎이 떨어지는 속도에 맞춰 눈물이 내려앉을 때였는데 나무가 내게 쏟아내는 말이 너무 많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종이 한 장에 달빛만 얹어 돌아왔습니다 *시집/ 설명..

한줄 詩 2022.06.01

일인칭 극장 - 이현승

일인칭 극장 - 이현승 마음이 하는 짓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였지만 또한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였으므로 어쩐지 위대함으로 압도하는 당신 앞에서 존경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을 우리의 자존심이라고 해도 될까. 마음은, 왜 그러는가 꼭대기 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의 숫자를 응시하면서 그런다고 더 빨리 내려오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더 힘껏 더 자주 호출 버튼을 누르고 멀리 보면 모두들 제각기 갈 길을 갈 뿐인데 누군가가 자꾸 내 인생으로 끼어든다고 생각하며 어쩌다 내가 가서 한잔하면 그 술집에 손님이 붐빈다거나 심지어는 내가 응원하는 팀과 선수는 내가 안 봐야 이긴다거나 변덕이죽 끓듯 한 이 마음 밖으로 나가는 길은 없는가. 마음은 유령거미처럼 종종 여기 없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누가 없..

한줄 詩 2022.05.31

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 박용하

구름이 낮아 보이는 까닭 - 박용하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계산이 묻어 나온다 반갑기보다 저의가 묻어 나온다 내심 잘도 잊지 않았구나 싶은데 낯 뜨거운 목적이 속 뜨겁게 올라온다 때론 뻔뻔하고 뻔하기도 하더구나 네가 아직 죽지도 않았더구나 궁금하기도 해서 난 하나도 궁금하지 않는데 넌 먼 강산과 오늘 날씨를 말하더구나 나의 형제들과 출신 성분을 끌어들이더구나 나의 흐린 문장을 말하더구나 뜻밖에 오는 전화 속에는 뜻밖의 일이 없다 쓸개 빠진 덕담과 공허한 잡담 부탁 아니면 둘도 없는 네 외로움 전화를 기다리던 날들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오는 전화 속에는 얄팍한 산술이 기어 나오더구나 네가 아직도 글을 쓰더구나 나는 내가 쓴 글에 관심 없는데 넌 먼 평판과 오늘 인심을 말하더구나 나의 벌거숭이 문장을 말하..

한줄 詩 2022.05.29

조난신호 - 전대호

조난신호 - 전대호 말 없는 바닥아, 목숨 붙은 이래 줄곧 허공에 매달려 있었기에 우리 서로 닿은 적 없구나. 필시 귀도 없을 네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했구나. 암벽에 달라붙은 그가 문득 이동을 멈추고 선뜻 이해할 수 없는 동작을 시작했을 때, 홀드를 왼손과 오른손으로 번갈아 쥐며 자유로운 팔로 새의 날갯짓을 흉내 내기 시작했을 때, 무릇 목숨 붙은 놈이 보내는 신호는 다 조난신호다. 그가 조난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곧 간다고, 철퍼덕 들이닥쳐 속을 다 쏟아놓겠다고, 바닥에게 기별하고 있음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뭐 대수로울 것도 없는 것이, 어차피 말 없는 바닥을 향한 조난신호였으므로. *시집/ 지천명의 시간/ 글방과책방 닻과 연 - 전대호 내가 내린 닻 바닥에 닿지 않았지. 애당초 기대하지 않..

한줄 詩 2022.05.29

멍 - 부정일 시집

천성이란게 있다. 성악설이니 성선설이니 그런 걸 떠나서 누구에게나 선과 악이 절반씩 들어 있다고 본다. 단 얼마나 선이 악을 누르고 표출되는 정도가 선함의 실천이지 않을까. 곧 악을 누르는 힘이 좀더 세게 태어난 사람이 선한 사람이다. 만약 악한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가 개과천선을 했다면 바로 누르는 힘의 강도가 악에서 선으로 바뀐 것이다. 내 몸 속에도 악과 선이 공존하고 있다. 웬만하면 욕심 부리지 말고 착하게 살겠다고 다짐하지만 굳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지가 않다. 무명 시인에게 눈길이 가는 것은 내 천성이다. 인생이 편하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지만 여태껏 단단한 긴 줄보다 허름한 짧은 줄을 택했다. 지금도 금메달보다 은메달이, 동메달보다 4등에게 마음이 더 간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느낀 바 만날 시..

네줄 冊 2022.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