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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없다 - 이소연

손이 없다 - 이소연 빛이 한 짓인가 간판 하나 믿고 들어앉은 마음 쫓아내는 빛 지금 이 순간에도 검게 스러지는 빛이 있고 끝까지 가고 싶은 빛이 있다 다시 쫓아가는 빛 상점들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숨을 쉬려고 숨 좀 쉬자 무정히 벌목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길, 발이 없는데 길이 있는가 걸을 수 있는가 그 어떤 발자국도 남길 수 없는 길 그러니까 양동이처럼 엎어진 마음이라 차례차례 건물 입구에 있네 산산조각 날 것이 더 이상 없는데 떨어진 그림자들이 외투를 찾을 시간 앞을 삼킨 건물주는 이제 뒤도 삼킬 거야 밤과 새벽 사이, 존엄이란 말은 더 이상 쓰이지 않고 나는 가끔 평생을 모은 일상부터 잊힌다 아시다시피 하루하루 달력 없는 골목에서 나는 하루의 마지막 일초였다 이제는 초침처럼 버려지는 빗소리를 ..

한줄 詩 2020.08.30

푸른 잉어의 나날 - 서영택

푸른 잉어의 나날 - 서영택 내 가슴엔 푸른 잉어가 산다 말을 할 때마다 잉어가 꿈틀거린다 지나가는 당신의 가방에서도 흘러내린다 차선을 넘고 도로마다 가득하다 그림자가 일그러진다 벽을 가른다 절망의 냄새도 기억되지 않는다 잉어가 아니라 잉여다 폭우는 모든 걸 허물지만 한번 세워진 관습은 완강하다 절망은 절망의 태도를 낳는다 보이지 않는 권력 지하로 편입된 나는 잉여를 먹고 산다 문들은 더 견고해지고 벽들은 높아진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밟아도 밟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시집/ 돌 속의 울음/ 서정시학 술빛의 저녁 - 서영택 취한 사내의 눈동자 속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길모퉁이 첫사랑이 펄럭이고 비는 이리도 내리는 걸까 마당에 매여 있는 소의 잔등에 더운 김이 오릅니다 아버지..

한줄 詩 2020.08.30

더 사랑하면 결혼하고, 덜 사랑하면 동거하나요? - 정만춘

제목이 특이해서 고른 책이다. 출판계도 불황이어선지 제목으로만 낚고 내용이 부실한 책들이 넘쳐나는데 이 책은 제목도 인상적이지만 내용물 또한 아주 흥미로웠다. 이 책은 네 명의 연인과 살아 본 동거의 기록이다. 저자 정만춘은 여자다. 일부러 남자 이름처럼 지은 예명같이 보이지만 본명인지도 모른다. 제목을 본 후 내용물에 앞서 날개에서 약력을 살폈다. . 폴리아모리? 이 단어에 막힌다. 다. 여러 사람을 동시에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데 뜻을 명확히 알자 책의 내용물이 궁금해졌다. 책 제목에 낚인 게 아니라 내가 책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정만춘이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고 약력만 보고 그녀를 섹X이라 생각했다. 남자 밝히는 여자를 섹X이라 하기에 이 단어는 청소년 보호에 들어가 있다..

네줄 冊 2020.08.29

개 같은 - 이돈형

개 같은 - 이돈형 즐거움을 떠난다 천천히 안에서 자라는 인기척의 새끼들은 이미 세상의 거짓말을 다 배우고도 모자라 한 번쯤 참말을 배우려 하는지도 몰라 빛 좋은 개살구처럼 빛을 따라다니며 어디서 살구살구 찾을지 몰라 떠난다 구질구질한 개과천선을, 실컷 뜯어먹은 안녕을, 아직 늙는 중이라는 변명을, 누런 이빨이 낀 차창을, 급정거한 애인의 엉덩이를, 꼬리 밟힌 즐거움을 인간적이라 말하던 인간적인 아가리를 운동화 끈을 매다 잊어버린 매듭의 주둥이로 떠난다 오래 걸린 눈동자의 노동이었다고 눈을 깔고 떠난다 열어보면 칙칙거리다 만 라이터처럼 버려진 눈이 가득한 캐리어를 끌고 떠난다 잡아먹힌 일화처럼 인간적인 사랑보다 차라리 개 같은 사랑이 낫겠다 싶어 개같이 떠난다 인간적으로 발정 나서 떠나는 것이다 *시집,..

한줄 詩 2020.08.29

테두리로 본다는 것 - 박남희

테두리로 본다는 것 - 박남희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멋을 위한 것일까 무슨 의미가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희뿌연 달무리가 떠오른다 달에게 달무리는 왜 필요할까를 생각해보면 안경 테두리의 효용을 이해할 수 있다 테두리로 본다는 것 눈과 세상 사이가 너무 황홀해 그 사이에 유리는 빼고 그냥 테두리로 세상을 보고 눈을 본다는 것 그냥 맨눈으로 보는 것이 너무 죄송해서 테두리로 보는 것의 속내를 이해할 수 있다 눈부신 세상을 바라볼 때 까만 테두리가 있어 세상이 또렷이 보이는 그런 당위성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테두리로 본다는 것 그것에는 왜 유리가 없느냐고 나무랄 수 없는 유한의 광활한 바깥이 있어 달보다 달무리가 아름다운 것이라고 토성이 천왕성을 보듯 그는 알이 없는 안경을 끼고 세상의 바..

한줄 詩 2020.08.29

저녁의 소리 - 손택수

저녁의 소리 - 손택수 종소리는 내겐 시장기 같은 것, 담벼락이나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라가 고양이처럼 오도마니 웅크려 앉은 저물녘이면 피어나는 분꽃과 함께 어린 뱃속에서 칭얼대며 올라오던 소리와도 같은 것, 그 굴풋한 소리를 그리워하며 살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만 야채트럭의 마이크 소리가 골목을 돌고, 저문 여울 속에서 배를 뒤집는 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 새소리가 살아나고, 담벼락 위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간 옆집 누나의 종아리, 종아리처럼 하얀 물줄기가 찰, 찰, 찰 화단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오고 어쩌면 먼지 풀풀 날리는 소음으로나 그쳤을 이 많은 소리들을 종소리는 내게 주고 간 것이 아닌지 그 소리들도 멀어지는 종소리를 듣기 위해 가만히 멈춰서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찬장에 엎어놓은 밥그릇처럼 저녁 ..

한줄 詩 2020.08.29

불시착 - 우남정

불시착 - 우남정 빈방에 하나의 침대와 비어 있는 의자가 비행운을 그린다 살비듬 핀 절벽에 검버섯이 말라붙어 있다 발끝에서 푸르스름한 바람이 올라온다 심박기의 그래프가 잦아드는 숨을 그리고 있다 검지를 물고 있는 감지기가 급히 우주로 심박을 타전한다 서둘러 온 창밖의 달빛이 교신할 듯 벌어진 입 언저리를 맴돌고 있다 호스피스 병동의 차고 푸른 적막 속으로 구조를 기다리는 흰그림자들이 일렁인다 다급하게 방문이 열리고 몇 억 광년 전 어느 별빛이 막 당도했는지 파랑 하나가 직선을 끌고 간다 계기판은 제로선을 그으며 찌- 무한이 돌아오고 있다 어머니! 마지막까지 떠나지 못하던 귀가 알아듣고 감은 눈에서 가만히 투명한 캡슐 하나가 흘러나온다 *시집/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문학의전당 풀물이 드..

한줄 詩 2020.08.28

모로 누운 당신 - 황형철

모로 누운 당신 - 황형철 이 소란이 잠잠해지고 말면 더욱 희미한 호흡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 이승의 숨으로는 갈 수 없는 가파른 길을 두고 돌아설 수밖에 없는 나는 모로 누운 당신의 두 손을 잡고 이별의 언저리를 서성이는데 소슬히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을 뚫고 강물처럼 잔잔한 당신의 착하고 순했던 평생이 밀려온다 딴전 한번 없이 예까지 온 생애도 측은한데 당신의 끝은 설움에 젖어 야위었고 우리가 건너야 할 서로 다른 벼랑을 보며 행여 들킬까 꾹꾹 울음을 누른다 나의 무엇을 당신에게 지녀줄 것인가 당신의 무엇을 나는 지닐 것인가 바람도 파랑도 없이 내 전부를 흔드는 당신 *시집/ 사이도 좋게 딱/ 걷는사람 뒤 - 황형철 내 뒷모습은 나 자신의 절반인 것인데 사이도 좋게 딱 반반씩 나눈 것인..

한줄 詩 2020.08.28

외롭지 않을 권리 - 황두영

생활동반자법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그런 법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일상 대화에서 말문이 막힐 때나 부당함을 당할 때 "그런 법이 어딨냐?"는 말을 한다. 사회가 변하고 삶이 다양해지면서 없는 법도 필요한 시대다. 휴대폰 기술이 날로 발전하는 것처럼 이것도 일종의 사회 진화의 과정이리라. 아직 생활동반자법이 도입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 법도 통과는 커녕 차별금지법처럼 언급이 될 때마다 찬성과 반대의 극한 대립으로 사회 논란으로만 그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언젠가는 도입될 법이지만 갈 길은 먼 법이 아닐까 싶다. 폐지가 되면 가정 근간이 완전히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이나 , 등도 오랜 기간 논란 끝에 사회적 합의에 도달했다. 일부 무슬림 국가에서는 간통죄를 엄히 다스리고 심지어 ..

네줄 冊 2020.08.27

소통 - 김호진

소통 - 김호진 늙은 친정엄마와 함께 딸이 약국에 들어선다 약 안 먹겠다는 노모에게 엄마, 약 그렇게 묵기 싫으마, 그만 죽어뿌라, 그게 편타~~ 내가 양지바른 데 잘 묻어 주께~~ 天氣의 창을 여닫는 장엄한 소리에 약국문틀이 움칫 흔들렸는데, 노모의 대답, 간결한 섬광처럼 틈을 메운다 망할 년! 그러고는 히죽히죽 웃는다 딸도 흐트러진 노모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따라 히죽댄다 완벽한 소통! 내가 우주에서 꿈꿔온....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 시와반시 이분연 - 김호진 장날 시골약국은 식전부터 소란하다 경상도에서 고함소리는 반가울 때 입는 정장옷 차림이다 버스시간 급해~, 내 약 먼저 줘~, 외치는 할머니의 목청은 명절 갓 쪄낸 가래떡처럼 찰지다 그러기에 쏟아지는 눈총은 아예 파장의 채솟값보다..

한줄 詩 2020.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