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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잖아요, 분홍 - 정진혁

있잖아요, 분홍 - 정진혁 분홍이라는 말 이제 좀 알 것 같아요 분홍으로 산다는 건 달콤하게 익어 가는 것 내 눈과 내 낱말들이 누군가의 한 잎 속에서 산다는 것 당신의 한 잎은 온통 숨결이어서 마음을 실어 나르는 수레여서 분홍 잎맥을 따라 스며든 시간들 사이여서 날마다 분홍 안에서 익숙해지는 몸짓 분홍을 입어요, 분홍을 먹어요, 분홍을 춤춰요 분홍은 나를 얼마나 멀리 밀고 가는지 있잖아요, 그거 알아요? 청평이라든지 덕적도 여수 부산 통영 무의도 같은 지명을 여기선 다들 분홍이라 불러요 한여름 배롱나무 산딸기 복숭아 떨어지는 꽃잎도 나는 분홍이라 불러요 분홍에서만 나를 느낄 수 있으니 뒤집혀도 분홍 분홍과 분홍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둥긂이 되었지요 있잖아요 분홍 한 장을 넘기며 가장 낮은 곳 ..

한줄 詩 2020.09.02

자서전 - 이우근

자서전 - 이우근 가을비 같았고 깨소금 같았고 은박지 같았고 시금치 같았고 찬물 한 그릇 같았다, 고 싶었던 스무 살 무렵도 있었습니다 이후로 지금까지 형편없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입니다 그렇지만 그냥 팽개칠 수는 없습니다 떠밀려 가더라도 손 내밀고, 혹은 끌려가더라도 드러누워 버팁니다 다만 저녁연기 피어오르는 사람들의 마음을 맑게 지켜봅니다 그 마음의 부동자세, 지속적이고 싶은, 다만 간절함으로. *시집/ 개떡 같아도 찰떡처럼/ 도서출판 선 낙화(洛花) - 이우근 피는 꽃과 더불어 지는 꽃이 있어, 주류(主流)에서 벗어나 추방을 당하며, 시절과 기후를 감지하여 혹은 생육에 밀려 낙하할 때, 단말마의 항변과 야유가 퇴행이 아님을, 그 꽃은 알고 잎은 알고 본질인 나무는 알리라 달콤한 열매에의 그 긴 시간의 ..

한줄 詩 2020.09.02

담쟁이의 하루 - 백성민

담쟁이의 하루 - 백성민 은밀함으로 기어올랐다. 행여 들킬까 바람의 기척에도, 달빛에게도 숨을 죽였다. 왜라고 묻지 마라. 감각의 촉수는 삶의 자리를 탓하지 않았고 그저 한 뼘만 더 오를 수 있다면 무엇인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바람이 몰아친다고 서리와 눈보라 속에서도 놓을 수 없는 것 때론 우직한 욕심이고 미련한 정직함이라고 손가락질할 때도 품어 안고 삭여야 할 모든 것이 감사함이었다. 사철 붉은 잎이 진다. 새벽은 먼데 오늘도 비틀거렸던 하루가 쓰러진다. *시집/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인 것처럼/ 문학의전당 황혼 - 백성민 해 저물녘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다 시들어가는 장미 한 송이를 본다. 가슴을 찔러오던 가시의 날카로움은 이미 시들었고 향기를 뽐내던 유혹도 사라진 지 오래 지워져 가는 시간..

한줄 詩 2020.09.02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 강준만

지난 4월 총선을 앞두고 나온 책이다. 읽어야지 했다가 뒤로 미뤘는데 뭐든 그렇지만 책도 한 번 미루면 읽을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며칠 전 알라딘 헌책방에 들렀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반값도 안 되는 가격의 새책 같은 헌책이다. 이 책은 지난 4월에 나오자 마자 조선일보가 마치 특종처럼 책 소개를 대서특필해서 화제였다. 문재인 정부가 망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는 신문사가 조선일보다. 게다가 당시 총선도 며칠 안 남았겠다 얼씨구나 했을 것이다. 그것도 조선은 신문 1면에다 단독이라며 이 책을 소개했는데 이런 사례가 있었는가 싶다. 덕분에 이 책은 손 안 대고 코풀 듯 엄청난 광고 효과를 누렸다. 1면까지 할애해 서평을 한 조선일보 요지는 이렇다. 강준만 같은 진보 지식인도 문재인 정부..

네줄 冊 2020.09.01

쓸데없이 헤프거나 막된 - 박수서

쓸데없이 헤프거나 막된 - 박수서 * 사랑은 밀가루반죽처럼 치댄다고 수제비나 칼국수가 될 수 없다 뚝뚝 떼어 뜨끈한 국물에 올려도 심장을 끓게 하지는 못할 일, 국뚜껑이 벌컥거린다고 다 진국은 아니야, 간이 덜 배인 그저 덜 우러난 육수의 뚝배기 귀를 만지작거리는 * 사내와 사내가 마주보고 있다 사내가 국을 건네고 사내가 술잔을 내놓는다 사내는 뭉크의 그림을 바라보고 있고, 사내는 바그다드카페를 가고 있다 사내는 뽕짝을 불렀고 사내는 만화영화 주제가를 틀었다 사내가 있었으나 사내가 없다 * 마라 맛을 넓고 깊게 느끼다 보면, 이것저것 라면 수프를 총집합한 풍미가 혀에 맺힌다 * 언제부터인가 혼자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 일이 불편하지 않아졌다 집 나간 텃새 백 마리를 헤아리며 꼭꼭 씹어 먹으면, 새털처럼 ..

한줄 詩 2020.09.01

서성이는 묘지 - 안숭범

서성이는 묘지 - 안숭범 벌초를 끝내자 단정한 죽음이 뒤챈다 먼 길 돌아가야 하는 여름밤이어서 풀벌레가 나를 불러 세우는 간격으로 살 오른 불안이 그때의 부음을 다시 앓는다 만약이란 약을 종종 복용해 왔다 오늘은 내가 사라진 이후의 우주에 대해 생각한다, 안으론 가뭄이었으나 물푸레나무처럼 이라고 쓰인 묘비명을 중얼거린다 자기가 모르는 시간에 이빨을 가는 영혼이 있었노라고 허나 자격 없는 그리움 한 줌 받았으므로 괜찮다, 하고 얼버무리자 하산하는 길이 정연하다 연필심이 부러지고 나서야 끄적이는 일을 생각하듯이 낡은 터미널엔 매미가 몸 뒤채며 지핀 가냘픈 바람 외등 곁에선 용케 부딪치지 않고 서로를 흠모하는 벌레들 자물쇠 채워진 자전거만 홀로 시간의 귀를 쓰다듬고 있다 자물쇠도 걸어 놓지 않은 마음에 관해 ..

한줄 詩 2020.08.31

만경창파 - 박미경

만경창파 - 박미경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밀려난 사랑초 명주실처럼 말라가고 있다 커다란 검정비닐에 담겨 나오던 생활 도구들이 소란스럽게 떠들다 남편에 의해 버려졌다 일가의 옷들은 포대기 터지도록 담겨 축 쳐진 채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올라오는 얼굴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간간이 치매 걸린 시아버지만 결코 잊히지 않는 기억을 붙잡고 큰소리로 나를 찾을 뿐이다 종일 흘러가는 길에 둥둥 떠다녔다 캄캄한 시간 속에서 짜놓은 계획 같은 것을 따라가기도 했다 곡선에 숨어 자라난 희귀성 침엽, 세 차례의 반복 만 팔천 번 따라온 고통, 장기 끝에 고인 똥물조차 끌어 올렸다 등 뒤에 바짝 붙어 얕은 잠에 빠진 아이의 숨소리 적막에 적막이 겹친 눈에 일렁이는 파도 *시집/ 토란꽃이 쏟아졌다/ 詩와에세이 꽃, 피는 때 -..

한줄 詩 2020.08.31

눈에 띈 슬픔 - 정병근

눈에 띈 슬픔 - 정병근 베란다에 '흰꽃나도사프란'이 시들었다 마른 꽃을 단 채 머리를 풀었다 정수리 가마가 다 드러나도록 이러하니 그만 창을 닫아줘요 간곡한 외면,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은유는 유구하고 옛날을 떠올리는 습관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있구나 순간의 예지로 사진을 찍고 너를 기린다 세상은 아무 곳과 아무 때와 아무 것이었는데 나로 하여 네가 생겨나고 헤어졌다고 들었다 네가 나의 한평생이 되는 그런 필연의 내막 속에 나는 자꾸 미끄러지고 어긋난다 아주 어긋나서 너를 오래 잃고 뒤늦게 안 보여서 운다 옛날에 저질러진 사람아, 내 눈이 가는 곳에 있지 마라 예쁘고 슬픈 상징이 너를 덮기 전에 눈에 띄는 것은 좋고도 슬픈 일이다 공중에 터지는 불꽃처럼 담장 위에 피어버린 꽃처럼 *시집. 눈과..

한줄 詩 2020.08.31

카스테라와 카스텔라 사이 - 고영

이 책을 읽고서 카스테라 빵을 사 먹었다. 잊고 있던 빵인데 실로 오랜만이다. 어릴 적 워낙 찢어지게 가난했기에 군것질을 모르고 살았다. 잘 사는 집 친구가 붕어빵 꼬리를 잘라 주면 강아지마냥 꼬리를 흔들며 넙죽 받아 먹던 아이였다. 그런 일은 없었지만 행여 장난으로 침을 묻혀 주었어도 받아 먹었을 것이다. 신문 배달, 음식점 알바 등, 일찍부터 스스로 용돈을 해결하며 학교를 다녔다. 그때 가끔 사 먹던 간식이 카스테라였다. 빵 밑에 깔린 종이에 묻은 카스테라를 이빨로 긁어 먹었다. 태생이 천해서일까. 중년이 된 지금도 식탐이 있다. 막 스무 살 넘긴 무렵, 알바로 노가다를 따라다닌 적이 있다. 식당 알바보다 훨씬 힘들었으나 돈을 더 많이 받는 이유다. 도배를 하는 팀을 따라 다녔는데 경력은 일천하나 가..

네줄 冊 2020.08.30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 김대호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 김대호 각시붓꽃이 거느린 보라의 세계는 겨우 자신의 체중을 견디는 정도였다 아침에 비 맞은 붓꽃과 반짝이는 보라와 뒷산에서 내려온 짐승을 보았다 내 하루는 그것들의 생태에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다 지중해로 여행을 떠났던 피곤의 배경이 아침에 본 보라의 세계라면 나는 더욱 사소해져야 될 일 사물의 풍경에 후회를 섞은 건 내 착각이었지만 내가 매일 여러 개의 퍼즐로 쪼개졌다가 잠들기 전 각각 다른 무늬를 분류하고 모으고 성질이 비슷한 장르끼리 묶는 수고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이것만으로 낯선 감정이 도착하지는 않으리 미신을 믿고 여름을 조심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모은다 너무 멀어서 은밀하지 못한 것들 너무 가까워서 부풀어 보였던 것들 아플 때마다 어둔 방을 방문하던 불편..

한줄 詩 2020.0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