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손이 없다 - 이소연

마루안 2020. 8. 30. 18:23

 

 

손이 없다 - 이소연


빛이 한 짓인가
간판 하나 믿고 들어앉은 마음 쫓아내는 빛
지금 이 순간에도 검게 스러지는 빛이 있고
끝까지 가고 싶은 빛이 있다
다시 쫓아가는 빛

상점들은 이산화탄소를 내뿜는다
숨을 쉬려고 숨 좀 쉬자

무정히 벌목되는 것은 절망이 아니라 길,
발이 없는데 길이 있는가
걸을 수 있는가
그 어떤 발자국도 남길 수 없는 길
그러니까 양동이처럼 엎어진 마음이라
차례차례 건물  입구에 있네
산산조각 날 것이 더 이상 없는데

떨어진 그림자들이 외투를 찾을 시간
앞을 삼킨 건물주는 이제 뒤도 삼킬 거야
밤과 새벽 사이, 존엄이란 말은 더 이상 쓰이지 않고
나는 가끔
평생을 모은 일상부터 잊힌다

아시다시피 하루하루
달력 없는 골목에서 나는 하루의 마지막 일초였다
이제는 초침처럼 버려지는 빗소리를
받아 씻을 손이 없다


*시집/ 나는 천천히 죽어갈 소녀가 필요하다/ 걷는사람


 

 

 

 

한강 - 이소연


거기선 아무도 새들의 안부를 묻지 않았다

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몰려다니며 바지에 흙을 묻혔다
스무 살의 한강에선 좀 더러운 일이 많았지
따귀를 처음 맞았고 목을 졸렸다
고환을 걷어차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

콩콩콩 뛰는 걸 보면
작고 푸른 곤충 같아
나를 죽이려던 사람이 맞을까?

되로 받고 말로 주는 일은 더러운 일이어서
나는 자주 손을 씻었다

신호등은 나만 보면 빨간불
사람들은 나만 보면 화를 내
나는 왜 때리는 놈만 만날까?

새의 안부가 궁금하다

삶이 잠깐 멈춘다

사과 썩는 냄새가 났다
바다에 살던 고기가 강에 와서 죽어 있다

언젠가 내가 버린 것들이 생각나서
그게 깜박하고 다시 내게로 돌아올까 봐
애인의 낡은 벨트가 물뱀처럼 돌아오거나
커다란 손바닥이 강가를 치며 돌아올까 봐

바다를 미리 보고 슬퍼하는
나는 조금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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