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개 같은 - 이돈형

마루안 2020. 8. 29. 19:35

 

 

개 같은 - 이돈형


즐거움을 떠난다

천천히 안에서 자라는 인기척의 새끼들은 이미 세상의 거짓말을 다 배우고도 모자라 한 번쯤 참말을 배우려 하는지도 몰라

빛 좋은 개살구처럼
빛을 따라다니며 어디서 살구살구 찾을지 몰라

떠난다
구질구질한 개과천선을, 실컷 뜯어먹은 안녕을, 아직 늙는 중이라는 변명을, 누런 이빨이 낀 차창을, 급정거한 애인의 엉덩이를, 꼬리 밟힌 즐거움을

인간적이라 말하던 인간적인 아가리를

운동화 끈을 매다 잊어버린 매듭의 주둥이로 떠난다
오래 걸린 눈동자의 노동이었다고 눈을 깔고 떠난다

열어보면 칙칙거리다 만 라이터처럼 버려진 눈이 가득한 캐리어를 끌고 떠난다 잡아먹힌 일화처럼

인간적인 사랑보다 차라리 개 같은 사랑이 낫겠다 싶어 개같이 떠난다

인간적으로 발정 나서 떠나는 것이다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걷는사람

 

 




안녕 - 이돈형


사이는 멀어지고 그 사이 맨얼굴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방에선 선풍기가 돌아가고 두루마리 화장지로 가끔 콧물을 닦으며 지나간 사람을 지나온 사람처럼 불렀다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애써 웃어주는 사람과 그 웃음 뒤의 막막함에 숨는 일로 잠시 웃어 보였으나

여름은 발에 걸리지 않아 부를 이름이 없고 수제비 같은 맨얼굴은 수시로 뚝뚝 끊어졌다

간밤엔 기억에도 없는 일을 하였다가 기억에서 사라진 건 아닐까 마신 술에 속아 울면서

수용하였다

간신히 입 다문 정든 수용소와 그 너머 안부까지

한밤중에 일어나 물을 마시며 여름을 보았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도 속았다는 걸 모르는 거다

빌려온 슬픔을 되돌려 보낼 수 있어 한여름은 없었다

그래서 안녕

 



# 이돈형 시인은 충남 보령 출생으로 충남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012년 계간 <애지>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이 있다. 김만중 문학상, 애지작품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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