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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방학 - 류성훈

서른의 방학 - 류성훈 당연한 듯 걷다, 줄어든 팔뚝을 슬쩍 잡을 때, 미열이 건너온다 매번 채워야 하는 내 배가 번거롭고 안도,라는 단어가 문득 생각나지 않을 때 젊은 구름들에게도 미소한 끝들이 있어 식은 그릇 같은 저녁을 골목 어귀에 두고 두꺼워짐에 서투른, 제 몸 나이테 어디쯤 넋을 태우는지 모르는 나무들이 깨끗한 발과 함께 멈춘다 닳을 일 없어 너와 네 헛된 옷깃을 부검하듯 살아 더 눈부신 목소릴 자꾸 긁는다 바지 뒷단이 끌리기 시작할 때 터진 종량제 봉투처럼 쏟아지는 저층운을 볼 수 있을 때, 녹이 앉은 줄만 괜히 뚱겨 보다 어스름 뒤편에 얇은 이불을 펼 때 오늘의 예보는 어떤 국지성 호우도 적중한다 앞으론 착하게 살지 않겠다고, 모든 허기가 따뜻한 우유처럼 목을 넘어가기를, 새벽 세 시의 쓰레..

한줄 詩 2020.08.20

어느 낯 뜨거운 날의 상념 - 윤일균

어느 낯 뜨거운 날의 상념 - 윤일균 파리에 달라붙은 개미 맥없이 손가락으로 개미를 비빈다 부슬비 오는 마당을 지렁이가 기어간다 맥없이 구두발로 지렁이를 밟는다 이슬에 젖은 쌀잠자리 꼬리를 잘라 맥없이 시집을 보낸다 살다가 보니 살다가 보니 이땅에 내가 개미요 지렁이요 잠자리인 것을 집개미 무리 지어 꿀병을 넘나 들고 지렁이 어린 동생 고추 끝을 쏜대도 잠자리동동 파리동동 날아들어도 너희들이 나인 것을 내가 너희들인 것을 *시집/ 돌모루 구렁이가 우는 날에는/ 도서출판b 꽃밥 - 윤일균 말복 되도록 이슬로 연명하는 잡초 여전한 마른장마 해 뜨자 숨 턱턱 막히는 또 하루 밥 푼다 몽골인 고려인 러시아인 서성대는 궁핍한 거리에서 한두 끼 허기 달래기도 버거운 눈빛들 서성이는 거리에서 땀 젖은 밥을 푼다 힘 ..

한줄 詩 2020.08.19

허공, 근육을 만드는 - 김성장

허공, 근육을 만드는 - 김성장 남자가 정자의 동쪽에 앉아 있었다 홀로였다 등이 주민증처럼 휘었다 느티나무 잎 하나가 신화의 속도로 땅에 이를 무렵 한 여자가 정자의 서쪽에 와서 앉았다 몇 도쯤 기울어진 시선으로 구절초를 보는 듯했다 남자가 홀로 있을 때 등은 다만 휘어진 주민등록증 곡선은 아무것도 주장하지 않았다 다만 여자가 등을 맞대는 순간 서서히 허공이 끼어들었다 어느 쪽에서 먼저 근육이 자라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등과 등을 이으며 근육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홀로 남자였을 때 그는 등을 강조하지 않았다 여자가 와서 반대 방향을 보고 앉는 순간 남자가 허공을 향하여 등을 꺼내 보이고 여자는 자기 등을 가지고 와서 거기 앉은 거였다 허공이 두 개의 등을 끌어당겨 근육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제는 허공..

한줄 詩 2020.08.19

그러는 동안 - 이운진

그러는 동안 - 이운진 돌보지 않은 사과알들이 떨어지고 떨어진 사과알이 썩어가고 그러는 동안 썩은 사과 속 벌레의 집에서 벌레가 태어나고 벌레는 다른 집을 지을 다른 사과나무를 찾아 나서고 그러는 동안 돌보지 못한 내 삶이 사과알처럼 떨어져 가슴속에서 썩어가고 슬픈 것을 너무 많이 보아서 슬퍼진 눈에 세상은 온통 벌레의 집이다 썩은 가슴으로만 얻을 수 있는 오로지 치욕으로만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기에 나는 이토록 많은 하루를 사과알처럼 떨어뜨려야 하는지 저 멀리 다른 땅 다른 사과나무에서 꽃이 피고 향기를 머금으며 떨어질 사과를 키우는 건 또 누구의 뜻인지 오늘도 사과나무는 붉은 과즙을 익힌다 나도 외로움의 껍질로 나를 감는다 그러는 동안 이 세상 무엇 하나 건드리지 않고도 가득히 햇살이 쏟아진다 사..

한줄 詩 2020.08.18

마른 치자꽃을 위한 노래 - 김인자

마른 치자꽃을 위한 노래 - 김인자 그도 한때는 매혹이었을 꽃 진 자리마다 가득한 향기 밤새 쓴 문장의 파지들이 시나브로 널려있는 책상 떠나기 전 화분에 묻고 왔을 작은 약속 하나 가지를 떠나 한 발 한 발 계단을 내려오면서 그도 몸은 땅에 두고 싶었을 것이다 나무와 연락이 끊긴 지 며칠째 피안과 차안을 넘나드는 저 마른 꽃의 잔향 잉여의 시간들 창으로 스민 얇은 햇살이 꽃이 잠들어있는 서재를 기웃댄다 꽃이 꽃다운 건 스스로 눈물을 닦을 줄 안다는 것 그러나 끝내 자신이 꽃인 줄 몰랐기에 꽃일 수밖에 없는 꽃 그도 처음엔 아무것도 모른 채 등 떠밀려온 여리디여린 싹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꽃으로 불리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치자꽃이 되었을 것이다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애월(涯月) - 김인자 그러니..

한줄 詩 2020.08.18

슬픔에게 - 권혁소

슬픔에게 - 권혁소 무지 때문이 아니라 희망에서 비롯된다 모든 슬픔은 처음이라는 기대와 마지막이라는 애절함이 슬픔의 기원이었음을 알았을 때 너도 나도 다시는이라는 단서를 달아 각오를 한다, 이제 더는 희망 같은 거와 속삭이지 말자고 그럴 때 삶은 주저앉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슬픔의 이면에는 어떤 단단함도 있어서 신발을 꺾어 신고서라도 우리는 다시 세상으로 나아간다, 생애 첫 다른 흔적을 남기며 그대 차가운 손을 덥히던 어떤 온기 같은 것 슬픔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슬픔아 부디 오래오래 머물러다오, 슬픔 너는 희망의 다른 이름 아니더냐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우리가 너무 가엾다 - 권혁소 배롱나무를 좋아하는데, 감나무도 한두 그루 있다면 좋겠는데 주춧돌 세운 여기는 배롱나무도 감나무도 뿌..

한줄 詩 2020.08.17

정거장은 한 세계다 - 한관식

정거장은 한 세계다 - 한관식 풍경이 정물처럼 멈췄다 갈라진 안과 밖으로 염치없이 진입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맑았고 구두는 반짝거리며 자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무료한 산새의 울음이 희미하게 이정표에 대롱거렸다 그 푸르고 역동적인 바람은 포플러 잎새를 다녀갔다 나는 쓸쓸하였다 오랫동안 비워진 공간을 채우기 위해 생성과 소멸이 도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거친 열정으로 먼 바다를 꿈꾸던 청년은 어디가고 정거장에서 혼자 서성이는가 듣는가 그대여, 바람을 안은 풀꽃은 아스팔트길의 끝을 찾아 두런거리고 무너져 내린 흙벽을 통해 소통하는 자유의 숨결 가거라 아직 생애는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실핏줄처럼 얽힌 인연을 안고 돌아올 고향과 함께 느릿한 희망에도 미소 지으며 저기 버스가 온다 *시집/ 비껴가는 역에..

한줄 詩 2020.08.17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인 - 도널드 홀

이 책은 미국의 계관 시인 도널드 홀(Donald Hall)이 여든 이후에 쓴 에세이다. 그래서 원래 제목도 다. 번역서인데도 제목을 잘 지어서 더 빛이 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 그럴 것이다. 오래는 살고 싶은데 죽는 것보다 늙는 게 걱정이라고,, 제대로 짚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에 늙지 않고 오래 사는 경우는 없다. 도널드 홀은 1928년에 태어나 2018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훈장까지 받은 계관 시인이라는데 그의 시를 읽어보진 못했다. 희한하게도 70년 이상 글을 썼고 50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유명 작가인데도 국내에 번역된 작품은 없다. 내 독서 편력이 협소한 탓인지는 몰라도 이 책 외에 다른 작품을 찾을 수 없다. 경제, 정치, 문화 모든 면에 미국의 영..

네줄 冊 2020.08.17

당신이라는 갸륵 - 김인자 시집

김인자 시인을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마도 여행 산문집이었을 것이다. 이따금 도지는 무당의 신기처럼 떠돌기를 좋아해서 여행책이라면 무조건 읽고보는 시절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떠나고 싶은 마음만 앞설 뿐 차일피일, 흐지부지 지나가기 일쑤다. 이 시인의 산문을 읽으면 여행도 일종의 중독이다. 거기다 해외 여행도 자주 가는데 남이 안 가는 낯선 여행지를 간다. 누구나 갈 수 있는 곳보다 아무나 가지 않는 그의 여행지가 마음에 들었다. 일종의 비주류 여행지다. 이런 여행에 환호하는 것은 내가 아웃사우더여서 더 그럴 것이다. 예전에 그가 쓴 이라는 산문집을 읽으며 느꼈던 것도 그가 지독한 여행 중독자이면서 아웃사이더라는 것이다. 트럭을 개조한 버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탄자니아, 케..

네줄 冊 2020.08.12

후유증 - 전영관

후유증 - 전영관 불행은 물고기 눈 같은 것 덮어지지도 않고 잠들지도 못한다 제 당혹에 맞는 피난처가 없는지 바람은 몸부림치며 골목을 휘젓는다 유연한 척하는 고양이 걸음에서 적응을 거듭한 애틋함을 공감한다 마비로 몸이 기울어질 때마다 한탄만 했다 고양이 눈은 현실의 두려움이 응집되는 초점 살아내는 모든 것들의 불안을 암시한다 아침마다 체육관에서 애를 써도 잠만 자는 고양이만큼 유연해지지 않아서 졸렬하게도 그 몸짓을 부러워했다 걸을 때마다 걸음의 리듬을 배반하는 왼발의 후유증 때문에 재활 의지를 의심받고 의료용 긍정을 한 다발씩 처방받았다 야린 이파리들이 징그러울 정도로 건강해진 동네 공원 제 존재를 증명하려면 더욱 차가워져야 하는 눈사람이 된 양 피가 돌지 않아 차가운 왼발을 뭉치듯 주무른다 왼쪽만 닳은..

한줄 詩 2020.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