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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느닷없는 - 권혁소

사랑, 느닷없는 - 권혁소 검버섯은 피고 근육은 점차 소멸할 때 물매화를 닮은 아린 사랑 하나 내게로 와서 꽃 피우라 속삭인다 혼자 잠드는 일에 익숙해지던, 맹물에 끼니를 마는 날들이 늘어나던 오월의 어떤 신록 무렵이었다 뒤늦은 사랑은 그렇게 느닷없다는 말과 함께 와서 격조했던 언어들에게 말을 걸고 화석이 되어가던 심장에 맑은 물줄기 하나 흘려놓았다 사랑 그것은 광장을 밝혔던 촛불 같아서 내가 어두울 때 비로소 나를 환하게 한다 어떤 꽃은 지고 어떤 꽃은 피던 때였다 *시집/ 우리가 너무 가엾다/ 삶창 바다처럼 잔잔히 밀려오는 사람 - 권혁소 나중에 당신을 기억할 때 바다처럼 잔잔히 밀려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오물오물 뱉어내던 그녀의 말을 잔잔히 밀려오는 바다 같은 사람이라면 좋겠어요,라고 읽는다 사..

한줄 詩 2020.09.17

아파트 민주주의 - 남기업

독특한 제목 때문에 읽게 되었다. 한국의 주거 형태는 아파트가 전체 주택의 50%를 넘어서면서 대세로 자리를 잡았다. 집 하면 이제 아파트를 먼저 떠올린다. 예전의 초등학교 미술시간에는 집을 그리라 하면 지붕부터 그렸지만 지금은 네모부터 그린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이 변하면 자연히 풍경도 바뀐다. 가장 먼저 골목길이 없어졌고 마당도 없어지고 빨랫줄도 장독대도 꽃밭도 없어졌다. 공기정화를 위해 실내에서 키우는 식물은 식물학대에 해당한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태양 아래 있을 때 행복하다. 사람 입장이 아닌 지구 입장에서 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칸칸이 단절되어 있는 아파트는 반환경적이다. 외국에는 가난한 사람이 아파트에 살지만 우리는 반대다. 속칭 영끌로 아파트를 사서 그 빚을 갚느라 평생 ..

네줄 冊 2020.09.16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 - 김옥종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 - 김옥종 어제도 너를 보내준 꽃무릇 길로 돌아오는 길에 하루에 한 번씩은 헤어짐을 준비해온 터라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은 없을 거라고 촉촉이 젖어있는 어둠에 볼을 비벼댄다 서로에게 가까이 가는 길은 너무 힘들어 배롱나무 꽃이 져버린 달력을 넘기며 어둑한 밤 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서 네 지친 그림자를 떠올리면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두려움인지 우리가 닮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 사방은 어둡고 다다를 수 없는 너는 파도로 살아나 가슴으로만 그 여린 가슴으로만 무너져 내리는데 눈물 한 방울 없이 거칠게 잊어 줄 것 같은 계절에 앞서 떠난 바람이 대숲을 흔들던 날에도 서로 다른 부위의 상처가 누구의 심장에도 박히지 못한 침엽수로 떠돌고 있었으니 우리가..

한줄 詩 2020.09.16

정선 몰운대 - 전영관

정선 몰운대 - 전영관 나무와 사람은 슬픔의 속도가 다를 것 투신할 것도 아니면서 새들의 높이에서 아래를 보면 사랑의 문장이 바람에 흩어지는 것 같아 아프다 나무의 슬픔은 천 갈래로 몸이 갈라지고 뒤틀리면서 백 년 동안 천천히 머무는데 어제의 상실과 몰락 따위를 한탄하였다 벼랑을 움켜쥐고 선 소나무는 몸피를 키우는 일보다 쓰러지지 않으려 뿌리만 더 굵어졌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것들이나 차지하려고 악력을 키웠다 건성으로 타인의 역경을 칭찬하듯 드러난 뿌리들을 감탄하였다 애련(愛戀)을 앓는 이에게 여기를 권하겠다 하늘을 우러르면 슬픔도 흩어질 것 백년 소나무 곁에 앉은 채로 풍장을 치러달라고 바람에게 부탁했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귀신 - 전영관 서로를 찌르는 가시덤불에 꽃을 놓다니 불행을 ..

한줄 詩 2020.09.16

어느 바위꾼의 죽음에 관한 짧은 보고서 - 박인식

어느 바위꾼의 죽음에 관한 짧은 보고서 - 박인식 추락사에 실패하고 (자유의 실패) 복상사를 꿈꿨으나 놓쳤다 (사랑의 실패) 마침내 다가오는 최후의 승리 고독사 (정확한 사인은 고독중독사) 3전 1승 2패 바위에서의 내 인생 전적은 *시집/ 인수봉 바위하다/ 다빈치 아직도 시퍼른 - 박인식 바위의 끝, 아무것도 없는 정상의 허망에 울던 그 노래 막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는 무엇을 찾으려 왔느냐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돈도 명예도 사랑도 다 싫다 가슴 베는 칼날 푸르고 푸른 허무의 후렴 젊은 날의 바위는 현해탄에 몸 던진 윤심덕의 死의 찬미 떨어져 하나의 돌이 되자던 산에서의 죽음 찬미 아직도 놓지 못한 꿈 아직도 다 못 부른 바위의 노래 아직도 현해탄 밤바다보다 서퍼른

한줄 詩 2020.09.16

먼 곳이 있는 사람 - 손택수

먼 곳이 있는 사람 - 손택수 걷는 사람은 먼 곳이 있는 사람 잃어버린 먼 곳을 다시 찾아낸 사람 걷는 것도 끊는 거니까 차를 끊고 돈을 끊고 이런저런 습관을 끊어보는 거니까 묵언도 단식도 없이 마침내 수행에 드는 사람 걷는 사람은 그리하여 길을 묻던 기억을 회복하는 사람 길을 찾는 핑계로 사람을 찾아가는 사람 모처럼 큰맘 먹고 찾아가던 경포호가 언제든 갈 수 있는 집 근처 호수공원이 되어버렸을 때를 무던히 가슴 아파 하는 사람 올림픽 덕분에 케이티엑스 덕분에 더 멀어지고 만 동해를 그리워하는 사람 강릉에서 올라온 벗과 통음을 하며 밤을 새우던 일도 옛일이 돼버리고 말았으니 올라오면 내려가기 바쁜 자꾸만 연락 두절이 되어가는 영 너머 먼 데를 잃고 더 쓸쓸해져버린 사람 나는 가야겠네 걷는 사람으로 먼 곳..

한줄 詩 2020.09.12

비가 오면 추억에 잠기는 건가요 - 김대호

비가 오면 추억에 잠기는 건가요 - 김대호 손톱 발톱이 돋아나 있는 자리가 내 몸에서 가장 먼 곳이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보다 먼 것이 있는 듯했다 내 몸의 일부인데 내 것인데 내가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것 수술을 하고 투시사진을 찍어도 현상되지 않는 것 그러나 내 몸의 일부로 있는 것이 분명한 것 수시로 내 몸의 수축과 이완에 관여하는 것 기분에 관여하는 것 아무리 긁어도 시원해지지 않는 것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 귀에 들어오고 고립되고 낮아지고 내 신체의 일환이지만 나와 따로 노는 것 내가 하지도 않은 말을 누군가의 눈빛에 퍼뜨리는 것 그게 무엇일까 어디서부터 그것과 내가 꼬인 것일까 평생을 좌우하게 했던 어떤 선택 그 순간부터 그것과 나는 꼬이게 된 것일까 죽을 때까지 가슴에 묻고 가야 할 일이..

한줄 詩 2020.09.12

이별 뒤에 남아서 - 한관식

이별 뒤에 남아서 - 한관식 찰과상 정도 가볍다고 생각한 나는 여전히 운동화 끈을 졸라매며 새벽을 내딛습니다 바람이 순합니다 발끝에 덜 여문 아침이 묻어옵니다 좀 더 속도를 낸다면 아침까지 내달릴 것도 같은데 새벽 산책로는 生을 사고파는 기대치의 가계처럼 늘 두근거리게 합니다 내 이전의 아우성 그것은 내 이전의 외침과도 같은 것. 어느 순간 욕망과 상관없는 일탈이 나를 첨예(尖銳)한 모습으로 만들어 종탑의 뾰족 지붕으로 살았습니다 이십대의 얘기였지요 고쳐 앉으면 가능성 없는 피안(彼岸)이기도 했습니다 운동화 끈이 이만큼, 풀릴 때도 되었는데 오지게 매듭처리가 된 듯합니다 지치면 등 뒤의 그리움이 말려 올라 무게가 되고 떠난 당신으로 하여 보푸라기도 한 움큼 묻어 날 것 같아 내 이웃도 놓친 한 발 한 발..

한줄 詩 2020.09.11

내가 짧아졌다 - 이강산

내가 짧아졌다 - 이강산 손에 쥔 것을 풀고 다시 쥔다 쥐는 것의 무게에 끌려 걸음이 빨라진다 이대로 길 끝에 닿을 수 있을지 들여다보면 어제의 내가 아니라 다행이지만 나는 어느새 나를 다 써버린 듯 그림자조차 짧아졌다 더 가볍거나 더 느리거나 내일도 모레도 반복될 나와 나, 길이 끝날 때까지는 나를 좀 아껴 쓸 일이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풍탁(風鐸) - 이강산 지금까지 채운 것 다 비우고 호수는 물뿐이다 바람의 손끝만 닿아도 심연까지 번지는 저 투명한 공명이라니 강원여인숙 102호실 문밖, 어느 방에선가 여인의 소리도 호수처럼 맑다 만 원짜리 지폐 두 장만으로도 떨리는 저 여인의 풍경이라니 세상의 호수와 여인숙을 건너 가까스로 이순의 추녀에 매달린 나는 아직 숨소리조차 둔탁한 쇠뭉치..

한줄 詩 2020.09.09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 허연

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 허연 사랑이 끓어넘치던 어느 시절을 이제는 복원하지 못하지. 그 어떤 불편과 불안도 견디게 하던 육체의 날들을 되살리지 못하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 ​ 그래도 약속한 일은 해야 해서 재회라는 게 어색하기는 했지만. ​ 때맞춰 들어온 햇살에 절반쯤 어두워진 너. 수다스러워진 너. 여전히 내 마음에 포개지던 너. ​ 누가 더 많이 그리워했었지. 오늘의 경건함도 지하철 끊어질 무렵이면 다 수포로 돌아가겠지만 서로 들고 왔던 기억. 그것들이 하나도 사라지지 않았음을. 그것이 저주였음을. ​ 재회는 슬플 일도 기쁠 일도 아니었음을. 오래전 노래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음을. ​ 그리움 같은 건 들키지 않기를. 처음으로..

한줄 詩 2020.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