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푸른 잉어의 나날 - 서영택

마루안 2020. 8. 30. 18:15

 

 

푸른 잉어의 나날 - 서영택


내 가슴엔 푸른 잉어가 산다
말을 할 때마다 잉어가 꿈틀거린다

지나가는 당신의 가방에서도 흘러내린다
차선을 넘고 도로마다 가득하다

그림자가 일그러진다
벽을 가른다
절망의 냄새도 기억되지 않는다
잉어가 아니라 잉여다

폭우는 모든 걸 허물지만
한번 세워진 관습은 완강하다

절망은 절망의 태도를 낳는다
보이지 않는 권력
지하로 편입된 나는 잉여를 먹고 산다

문들은 더 견고해지고 벽들은 높아진다

비가 와도 젖지 않는 것들이 있다
밟아도 밟히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시집/ 돌 속의 울음/ 서정시학

 

 




술빛의 저녁 - 서영택


취한 사내의 눈동자 속
소낙비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저물어 가는 길모퉁이 첫사랑이 펄럭이고 비는 이리도 내리는 걸까 마당에 매여 있는 소의 잔등에 더운 김이 오릅니다 아버지는 작년 봄 소낙비가 저수지 목까지 차올라 빠져 죽은 형을 기다립니다

비가 형을 끌어들였노라고 종일 울음이 내리고 있습니다 빗방울은 집안을 둘러보려고 자꾸만 마루로 올라오고

죽은 형이 마당에서 주룩주룩 비를 맞고 서 있습니다

부엌에 앉아 나는 어머니 몰래 설탕물 듬뿍 넣은 미숫가루에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가슴에 고인 빗물을 하염없이 빗자루로 쓸어내리고
어둠이 술 내음으로 물들고 있습니다

 

 

 

*시인의 말

 

어제의 나를

가까스로 오늘에

데려다 놓는다

 

새와

햇살과

그림자, 그리고

모든 이름 옆에

 

창문을 활짝 열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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