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4746

슬픈 영화 - 이철수

슬픈 영화 - 이철수 -대인동 별들의 고향 지나 영자의 전성시대가 끝나고 , 그때 사라진 대한극장 뒷길에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맨발의 청춘들이 몇 장, 추억의 찌라시가 되어 침침한 가등 아래 두근두근 암표상처럼 서성이고 있다네 예고편도 없이 너무 쉽게 열려버린 생의 안쪽 문은 다시 잠글 수 없고 얼룩진 꽃무늬 벽지처럼 눅진한 자폐의 얼굴들만 희멀거니 낮달이 되어 떠도는 골목 언제나 밤보다 먼저 찾아온 어둠이 마른 지푸라기처럼 몸을 뒤척이는 살구나무집 쪽방, 때 절은 암막커튼 뒤에서 동시 상영되는 영화, 어룽어룽 달그림자 아래 푸석하게 빛이 바랜 스카프들이 바닥 없는 낡은 뱃전에 기대어 고단한 날개로 닻을 내린 갈매기 항구 너무 무거워서 빠르게 잠겨버린 생이 스스로 결박을 풀지 못해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

한줄 詩 2020.08.12

보험은 말씀처럼 - 정병근

보험은 말씀처럼 - 정병근 보험 광고의 예언에 의하면 나는 언젠가는 사고를 당하거나 아플 것이고 그래서 가족들을 고생시킬 것이고 또박또박 예비하지 못한 인생 때문에 살면서도 뼈저리게 후회할 것이고 그리하여 이래저래 나의 말년은 가파를 것이 뻔하고 이미 내일인 오늘을 후회할 것이고 그것 보란 듯이 나는 불행한 자의 모법이 되어 구질구질하게 살다가 내가, 내가 아니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죽어갈 것이다 아니라고 생각해 보지만, 보험은 줄기차게 나의 불행을 입도선매한다 유비무환을 한 귀로 흘린 자 삼가지 않고 섬기지 않은 자 함부로 웃다가 아무렇게나 죽어버리는 *시집/ 눈과 도끼/ 천년의시작 선인(善人) - 정병근 보일러가 고장 나서 사람을 불렀다. 노랑머리에 챙 모자를 쓴 청년이 불..

한줄 詩 2020.08.11

소보로빵 - 김옥종

소보로빵 - 김옥종 공사장 철제 사다리 위에서 떨어져 뇌를 다쳤다던 영광 아재는 새벽 두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소보로 빵을 뜯어 잡수신다 보름 동안을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나는 부시럭거림과 동시에 튀어 오르는 아픈 냄새가 반대편 병상에서 화투패처럼 날아오면 그제서야 살고 싶어졌다 아니 빵을 먹고 싶어졌다 아재는 세 번째 봉지를 마저 뜯어 배가 불러오고 내 배는 늑막까지 복수로 차올랐다 아재는 살기 위해 먹지만 나는 먹기 위해서라도 살아야겠다 뇌가 차갑게 인식하면 생이 뜨겁게 반응한다 밤새 창문에 쏟아 붓던 수액이 폐를 적시고 호랑이 장가가는 비가 내려 묵은 먼지가 아침 햇살 사이로 날아오르면 구름이 만들어놓은 부스러기 곰보빵과 생크림 사이 딸기 얹은 소보로와 조청 묻힌 쑥꿀레가 봄볕에 버짐처럼 혈관을 ..

한줄 詩 2020.08.11

날씨는 먹구름을 발표하고 - 김대호

날씨는 먹구름을 발표하고 - 김대호 한사람에 대한 치유가 살아 있는 증거가 될 때 그날, 난 아무것도 안 하고 걷기만 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만 보았다 병원에서 나와 편의점까지 가는 동안 거리에서 무수한 행인들의 눈빛이 이국의 문장이 되어 내 외투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손바닥 실금이 젖었다 살아질 거예요 걱정 마세요 의사의 말이 평범하게 남아 있다 이 이국의 거리 의사의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했고 내가 의사에게 질문한 것도 모국어가 아니었으니 두려움의 파장만 있다 먹구름을 발표하는 날씨이다 편의점을 나오면서 병원 복도에 대기 중인 환자들의 눈빛을 닮은 상품들이 진열대에 다소곳이 진열돼 있는 것을 보았다 그날 나는 이국에서 온 통증을 모국어가 아닌 중얼거림으로 몸에 담았다 *시집/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

한줄 詩 2020.08.11

침침하다 - 정덕재

침침하다 - 정덕재 침침하다 가끔은 겹쳐 보이고 흐릿흐릿 숫자가 6인지 5인지 선명하지 않아 돋보기를 찾는다 미간을 좁히며 바라보는 게시판 벽보에서 디딤돌 같은 미음 받침이 힘겨워 보이거나 탈락한 받침들이 아우성거리면 문자를 깨우친 반세기의 세월이 소란스럽다 어느새 까마득한 저편이 되었는데 허겁지겁 인공눈물을 찾거나 걸쳐 쓴 돋보기를 올린다 안과에서 인공눈물 한 박스 들고 나오면 무심코 식탁 다리에 발목을 부딪친 눈물은 견딜 수 있는 위안이지만 건조한 것은 눈이 아니라 메말라 갈라진 갈증의 응시다 *시집/ 간밤에 나는 악인이었는지 모른다/ 걷는사람 1235를 아시나요 - 정덕재 내 비밀을 알려줘 복잡한 내 비밀을 알려줘 어제 바꾼 비밀변호가 생각나지 않아 내가 나를 몰라 1234567로 하면 쉽게 알까 ..

한줄 詩 2020.08.10

멈춰선 돌멩이 - 이학성

멈춰선 돌멩이 - 이학성 언제부터 그가 침묵하고 있었을까. 왜 여기 그는 멈춰서 있는 걸까. 나도 한때는 세상 어디로든 갈 수 있으리라 굳게 믿었지. 멀리, 더 멀리 가보려고 했으나 애타게 기다리는 이가 있어 과거로 돌아와 털썩 주저앉곤 했지. 그도 막다른 어디선가 돌아온 건가. 언제든 다시 달아나려고 궁리하는 중인가. 아니, 아니 이제야 기다리는 이의 심중을 읽었거나 힘없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한 건가. 어쩌면 그는 나보다도 멀리서 왔을 거야 기어이 돌아가려면,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야 해 기다리는 걸까. *시집/ 늙은 낙타의 일과/ 시와반시 도제 - 이학성 스승이라곤 내게 없었다. 학교 문턱을 요행히도 넘어서거나 교범이라도 한 줄 훔쳐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헐렁한 그릇을 누가 품어주겠는가. ..

한줄 詩 2020.08.10

슬픔도 태도가 된다 - 전영관 시집

예전에 출판사 세계사에서 나오는 시집을 부지런히 읽던 시절이 있었다. 그곳에서 나온 시집은 어떤 것을 골라도 마음에 들어오는 시가 많았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읽었던 시절이었는데도 눈에 들어오는 시와 겉도는 시는 구분이 되었다. 당시에 나온 대부분의 세계사 시집을 읽었다. 조금씩 시에 눈을 뜨게 해준 출판사라 하는 것이 맞겠다. 지금은 대표가 바꼈는지 아니면 출판 방향이 변했는지 시집 내는 것이 시들해졌다. 하긴 돈 안 되는 시집 출판이기에 무조건 나무랄 수는 없다. 전영관 시인은 세계사에서 나온 첫 시집 를 읽고 알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첫 시집에 마음 주기 쉽지 않은데 제목만으로 눈에 확 들어왔다. 애초에 내가 타고나기를 바람기 가득한 창녀 기질에다 무당처럼 역마살과 바람이 난 신기 때문에 더 그랬을..

네줄 冊 2020.08.10

고운 밥 - 전윤호

고운 밥 - 전윤호 신도 동네마다 이름이 달라 다르게 부르면 해코지하는데 밥은 사투리가 없다 이 땅 어디나 밥이다 함께하면 식구가 되고 혼자 먹어도 힘이 되는 밥 어떤 그릇을 놓고 어떤 수저를 펼쳐놓든 김이 오르는 밥 앞에서 모두 평등하니 이보다 귀한 이름이 더 있겠나 논이 부족한 제주도에서 쌀밥은 아름다워 곤밥이라 부른다니 사랑하는 사람이여 우리 밥이나 함께하자 *시집/ 슬픔도 깊으면 힘이 세진다/ 북인 환한 이별 - 전윤호 벚꽃이 이리도 환하게 지다니 오늘은 이별이 있어도 되겠네 차마 손 흔드는 가지에서 젖은 길바닥까지 하얀 이 드러내고 웃는 꽃잎들 세상이 이리도 예쁘니 슬프다 울 수도 없겠네 이제 낡은 다리 건너 떠나니 그대는 맘 편히 열매 맺으시라 잎 지는 가을 돌아와 꼭 껴안고 얼어붙어 겨울을 ..

한줄 詩 2020.08.09

인수봉 귀바위 - 박인식

인수봉 귀바위 - 박인식 새도 바람도 기척 없을 때 인수봉은 듣는 귀가 있어 운다 그 바위 울음을 노란 별밤으로 그려놓은 화가는 인수봉 꿈속의 고흐였을까 고흐 꿈속의 인수봉이었을까 바람의 대답을 듣자며 고흐는 자른 귀를 동네 창녀에게 주었는데 인수봉은 한쪽 귀를 누구에게 주었나 (목청 좋은 사람에게?) 인수봉 귀바위가 바람의 대답을 듣고 있는 걸 고흐는 알까 한쪽 귀로 남아 인수봉, 귀바위하다 고흐, 귀하다 무상(無償)의 행위예술하다 *시집/ 인수봉 바위하다/ 다빈치 인수봉, 고흐의 자화상 - 박인식 한쪽 귀를 잃은 외귀의 인수봉이 한쪽 귀 스스로 자른 고흐의 자화상으로 다가온 날 내 귓가에 맴돌던 미친 예술의 노래는 인수봉의 사라진 한쪽 바위 귀가 듣던 바람의 노래인가 고흐의 귀를 받아 든 아를르 여인..

한줄 詩 2020.08.08

후회는 너의 몫 - 성봉수

후회는 너의 몫 - 성봉수 나를 걸어 잠그고 나서지 않는 동안 기다려 주지 않은 시간과 돌아오지 않는 사람 내 안에 앉아 알 수 없었거나 그때는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 지금의 내게 후회로 남은 것처럼 지금은 아직 네 것이 아닌 것들에 대한, *시집/ 검은 해/ 책과나무 콧구멍에 흰 털 - 성봉수 늙은 잡종 개처럼 콧구멍에 털이 세상 밖으로 삐져나온 날 아버지가 면도하시던 거울 앞에 족집게를 들고 섰다 어라, 이것 봐라 흰 털이다. 콧구멍에 흰 털이라니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기가 차는 노릇이다 아버지, 얼마나 많은 절망에 마주 서고 얼마나 많은 시름을 삭여 가며 세어 버린 세월을 안으로 감춰 두고 티도 없이 그토록 당당하셨느니 # 성봉수 시인은 1964년 충남 조치원 출생으로 1990년 신인작품 당선으..

한줄 詩 2020.08.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