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소통 - 김호진

마루안 2020. 8. 27. 19:17

 

 

소통 - 김호진


늙은 친정엄마와 함께 딸이 약국에 들어선다
약 안 먹겠다는 노모에게
엄마, 약 그렇게 묵기 싫으마, 그만 죽어뿌라, 그게 편타~~
내가 양지바른 데 잘 묻어 주께~~

天氣의 창을 여닫는
장엄한 소리에 약국문틀이 움칫 흔들렸는데,
노모의 대답,
간결한 섬광처럼 틈을 메운다

망할 년!

그러고는 히죽히죽 웃는다
딸도 흐트러진 노모의 옷매무새를 매만지며 따라 히죽댄다

완벽한 소통!

내가 우주에서 꿈꿔온....


*시집/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 시와반시

 

 

 



이분연 - 김호진


장날 시골약국은 식전부터 소란하다
경상도에서 고함소리는 반가울 때 입는 정장옷 차림이다
버스시간 급해~, 내 약 먼저 줘~, 외치는 할머니의 목청은
명절 갓 쪄낸 가래떡처럼 찰지다
그러기에 쏟아지는 눈총은 아예 파장의 채솟값보다 헐하다

현명하게 처방전을 미리 맡겨두고
장터 한 바퀴 돌아 고등어 한 손 쥐고 온 봉화댁은
오리무중인 자기 약의 행선지를 묻고 또 묻는다.
못 들은 척, 새치기 지은 처방약 들고 이분연씨~ 하고 부른다.
없다!
또 부른다. 이분여~언씨~
묵묵무답!
이분연 할매 어디 갔능교?
짜증나고 민망스러워 주섬주섬 조제실로 돌아서는데
느긋이 앉아있던 한밤홍씨 할매가 목소릴 높인다
여기 이뿐년이 어디 있노?
다 쭈굴랑 할망구들이지!

한바탕 팝콘 같은 웃음꽃이 성긴 약장 틈새를 단번에 채운다


 


# 김호진 시인은 대구 출생으로 영남대 약학대학을 졸업했다. 1994년 <심상>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생강나무>, <아흐레는 지나서 와야겠다>가 있다. 의성군 금성면 탑리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약사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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