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녁의 소리 - 손택수

마루안 2020. 8. 29. 18:53

 

 

저녁의 소리 - 손택수


종소리는 내겐 시장기 같은 것, 담벼락이나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라가
고양이처럼 오도마니 웅크려 앉은 저물녘이면
피어나는 분꽃과 함께
어린 뱃속에서 칭얼대며 올라오던
소리와도 같은 것,
그 굴풋한 소리를 그리워하며 살게 될 줄 어찌 알았을까만
야채트럭의 마이크 소리가 골목을 돌고,
저문 여울 속에서 배를 뒤집는 피라미떼처럼
반짝이는 새소리가 살아나고,
담벼락 위에 사다리를 걸치고 올라간 옆집 누나의 종아리,
종아리처럼 하얀 물줄기가 찰, 찰, 찰 화단에 떨어지는 소리도 들려오고
어쩌면 먼지 풀풀 날리는 소음으로나 그쳤을 이 많은 소리들을
종소리는 내게 주고 간 것이 아닌지
그 소리들도 멀어지는 종소리를 듣기 위해 가만히
멈춰서 있었던 것이나 아닌지
찬장에 엎어놓은 밥그릇처럼 저녁 하늘에 엎어놓은 종
당기면 배부터 아려오던 소리, 이상하다,
그 종소리가 내 귀엔 아직도 울리는 것이
종소리 없인 저녁이 오지 않는 것이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 창비

 

 

 

 

 

 

파미르 고원 - 손택수


만년설 아래 비탈을 마르코 폴로 양 어미와 새끼가 올라가고 있다
어미는 한사코 새끼를 떨어뜨리려 하고
새끼는 어미 곁을 떠나지 않으려 안간힘이다 부러
비탈만 비탈만 골라 딛는 어미의 뜻을 헤아리기에 새끼는 아직 어리다
아가, 어서 돌아가거라, 저긴 혼자서 가는 길이란다
누구나 혼자만 갈 수 있는 최후의 길이 있단다
비탈에서 새끼 양이 상하기라도 할까봐
평지로 내려온 어미 양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 달리기 시작한다
더는 따라올 수 없도록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어미를 부축하던 새끼의 걸음도 울음도 이내 멀어지고
어미는 앞다리를 꿇고 대지에 경배하듯 머리를 눕힌다
저 앞의 죽음까지 몇 걸음을 혼자서 더 걸어갈 수 있도록
꺾이지 않고 있던 뒷다리를 마지막으로 접는다
여행자의 이름을 가진 양 마르코 폴로

언제였던가 선친과 함께 보던 다큐멘터리 속 장면
이튿날이면 사체 주위로 늑대와 여우와 까마귀떼가 몰려온다
체취를 따라온 새끼가 멀리서
어미의 장례를 지켜보고 있는 파미르 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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