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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론 - 이서화​

연장론 - 이서화​ 손을 놀려야 먹고산다고 말한 사람은 몇 년째 손을 놀리고 있다 펜치며 연장들의 앙다문 입으로 녹이 눌어붙어 있다 잔뜩 오므린 채 떼어도 펴지지 않는 식음 전폐다​ 몇 년 무소식 끝에 집수리 부탁하려 찾아간 김 씨의 사정은 사람도 기술도 그 수족도 폐업이다 수많은 연장들의 수장이었던 사람은 밥보다 알약을 더 많이 먹는다 그나마 열리는 입에선 흔들리고 떠는 말들뿐이다​ 돌아오는 길, 봄은 또 연장들도 없이 나무마다 달라붙어 꽃 피는 공사 중이다 고장 난 우리 집 수도 파이프는 어느 봄의 독촉으로 졸졸 새고 있는가 꽉 다문 연장들의 입을 어떤 봄의 입김으로 녹여야 하나 *시집/ 낮달이 허락도 없이/ 천년의시작 집밥 - 이서화 둥그런 양은 밥상에서 후일을 도모하던 칠 벗겨진 봉황이 생각난다 ..

한줄 詩 2020.08.27

내일은 해가 뜬다 - 장철웅

내 과거를 말하지 마라 바람처럼 살았다 언젠가는 너도 나처럼 괴로울 때가 있을 거다 산다는 것이 무엇이더냐 그 누구도 말하지 않던 내 인생의 괴로움을 술잔 속에 버렸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 청춘을 말하지 마라 한 순간에 가버렸다 언젠가는 너도 나처럼 허무할 때가 있을 거다 지난 세월에 원망을 말자 돌아서서 후회도 말자 내 인생의 서러움을 술잔 속에 버렸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내 미래를 말하지 마라 웃으면서 살 거다 언젠가는 맘 먹은 대로 달려갈 때가 있을 거다 산다는 것이 그런 거라고 울다가도 웃는 거라고 돌고 돌고 도는 인생 비바람이 불어 와도 내일은 해가 뜬다

두줄 音 2020.08.27

몸의 작은 틈으로 - 김윤배

몸의 작은 틈으로 - 김윤배 ​ 언젠가, 건너기 위해 토함산의 일출쯤이면, 개마고원의 낙조쯤이면 어떨까 텐산의 봄빛쯤이면, 타클라마칸의 겨울쯤이면 어떨까 건넌 후, 서러워지면 몸의 작은 틈으로 펼쳐지는 미답의 생애는 적막한가 홀로 채색에 이르는 야생화, 그 꽃말들을 접으며 상실을 떠올렸다 상실 뒤에 많은 달빛의 빗장이 있다는 걸 터키식 커피 점괘로 알았다 어둠 깊어 커다란 별들이 호수를 이룬다 호수의 물결이 설렘이란 걸 깨닫고 나면 뒤에 남겨진 것은 밤하늘에 안긴 벗은 달몸이었다 무거운 속눈썹에 밤이슬 내리고 지상에서의 숨결은 다시 아프다 *시집/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휴먼앤북스 파문 후의 꽃고비꽃 - 김윤배 군락을 이룬 꽃들 북쪽으로 쓰러지다/파문의 시작인 것 파문을 맞다/돌이킬 수 없는, 길..

한줄 詩 2020.08.23

처서(處暑) - 류정환

처서(處暑) - 류정환 꽃피던 날들이 언제였던가, 뜨겁던 여름날도 어느새 다 지나갔구나, 바람이 벌써 어제하고 다르네, 중얼거리며 쓸쓸한 기운을 털어내는 아침 놀랍게도, 밥상머리에 앉은 아들이 대꾸를 한다. "오늘이 처서잖아요." "니가 처서를 다 알아?" "모기 입이 돌아간다는...." 올여름엔 구경도 못 한 모기까지 들먹이다니 제법이다. 땅에선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선 뭉게구름 타고 온다더니 올해 처서는 갓 스무 살 지난 아들의 말끝에 묻어서 왔다. 좋은 날이다, 꽃피는 시절은 지나간 게 아니라 아들놈 얼굴로 옮겨간 거로구나! 입춘. 청명, 하지, 처서, 모든 날들은 한 밥상에 뒤엉켜 있는 거로구나! 천기(天氣)가 크게 바뀌는 때. 쉰다섯의 또 한 절기를 돌아가며 여름의 뒷모습처럼 꽁지가 허..

한줄 詩 2020.08.23

죽음을 배우는 시간 - 김현아

참 좋은 책을 읽었다. , 공교롭게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의사협회가 대규모 집회를 열고 파업을 예고하며 정부와 대립하는 시기였다. 그동안 여러 문제로 정부와 불편한 관계였던 의사협회가 의대생 정원을 늘리는 문제로 더욱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의대 정원을 늘려야 한다는 정부 정책에 동의한다. 이 책의 저자는 현역 의사다. 나는 언제가부터 의사에 대해 별로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 책에서 많은 걸 느끼고 배웠다. 저자가 글도 잘 쓰고 개념 있는 의사라는 생각을 했다. 서울 가본 놈과 안 가본 놈이 싸우면 안 가본 놈이 이긴다는 말이 있다. 많은 분야에서 이론으로 무장한 얄팍한 지식으로 전문가 행세를 하며 대중을 현혹하는 돌팔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책의 저자는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죽음을..

네줄 冊 2020.08.23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 김대호 시집

공교롭게 이번 시집 후기도 출판사 에서 나온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여기서 좋은 시집이 연달아 나오는 걸 어쩌랴. 가능한 편식을 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 시집도 내 마음을 딱 사로잡았다. 목차도 읽지 않고 그냥 몇 페이지 넘기다가 이 시인 나와 맞겠구나 촉이 온다. , 홀린 듯이 서너 편의 시를 읽고 시인의 약력을 살폈다. 경북 김천에서 출생하여 2012년 시산맥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는 짧은 약력 뒤로 호기심이 발동한다. 시 한 편 한 편이 예사롭지 않게 읽힌다. 모처럼 마음에 담을 만한 제대로 된 시인 하나 만난 기분이다. 시집을 읽고 작가를 논리적으로나 문학적으로 평가할 능력이 내겐 없다.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생각을 나열할 뿐이다. 이것이 아마추어 시 읽기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얼굴 ..

네줄 冊 2020.08.22

불과, 혹은 - 정훈교

불과, 혹은 - 정훈교 몇 번의 침묵이 흘렀다 ​ 마흔 또는 그 고비에 이르러 죽은 그림자를 낙타는 부둥켜안았다 강으로 떠내려간 이름과 흰 벽을 타고 오른 이름과 초성 두어 개 떨어져 나간 녹슨 이름을 부둥켜안고, 그가 들어섰다 ​ 모두가 바람벽이라고 한, 그 몇 해 동안 그는, 녹슨 이름을 훈장처럼 부둥켜안고, 살았다. ​ 그 누구도 그의 이름 함부로 부르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발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고, 잊어서도 안 되는 이름이었다, 극성이 유난히 빛나는 삼경(三更)에도 그의 이름은, 암호처럼 어두웠다 그는 겨울 동백을 아들처럼 품고, 살았다, 산 자는 말이 없었고 죽은 자는 역사로 살아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낙타는 빈 들판에 서서 다리가 잘려 나간 이름 몇 개를 태웠다 그리고,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

한줄 詩 2020.08.21

걸음이 느린 아이 - 고유진

고유진 - 걸음이 느린 아이 함께 걸으면 손 닿지 못할 만큼 한참을 뒤에 오던 그녀였죠 빨리 오라며 그녀를 다그치고 답답한 마음에 난 앞서서 걸었는데 천천히 걸을 걸 그랬죠 먼저 간 날 잃었었는지 그녀가 오질 않네요 하루를 헤매다 돌아온 그녀는 어제보다 많이 다른 모습이죠 날 보며 웃는 미소도 그 향기도 모두 예전과 같은데 낯설은 그대 모습 사소한 일로 많이 다툰 날이었죠 평소와 다른 그녀 모습 보고 먼저 다가가 그녀를 달래 봤지만 내 말도 들으려 않은 채 울고 있죠 사랑하는 사람 있다고 허락해 줄 수만 있다면 그 사랑 안고 싶다고 고개를 저으면 그저 난 저으면 예전처럼 다시 만날 수 있나요 조금 더 함께 하고파 그렇게도 천천히 걷던 그녀를 알지 못한 내 죄로 보내야 하나요 그대 혼자서 나를 남겨둔 채 ..

두줄 音 2020.08.21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 허연 시집

허연 시인이 다섯 번째 시집을 냈다. 어쩌다 그의 시에 중독이 되어 고대하며 기다렸던 시집이기도 하다. 이 시인을 알게 된 것은 세계사 시집을 만나면서다. 김형술, 이연주, 진이정, 유하, 그 사이에 허연이 있었다. 지독하게 외로웠던 시기에 그의 시를 만났다. , 제목부터 딱 마음에 들어오는 시집이었다. 내가 시를 읽었을 뿐인데 그의 시가 말을 걸었다. 눈물 나게 고마웠다. 위로 받고 싶을 때 다독여 주었고, 울고 싶을 때는 뺨을 때려줬다. 밝음보다 어둠, 기쁨보다 슬픔을 말하는 그의 시가 마음에 들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일까. 한동안 시를 쓰지 않은 탓에 점점 잊혀졌다. 10년이 훨씬 지나 잊고 살 무렵 두 번째 시집을 들고 나타났다. , 그가 먹고 살기 위해 시를 떠나 있었던 나쁜 소..

네줄 冊 2020.08.20

분꽃 - 김말화

분꽃 - 김말화 머리카락이 희끗해지도록 기억할 만한 행복 하나 변변히 없는 여자 등 뒤로 바람이 지나가고 생각난 듯 분꽃이 피었다 한번도 행복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취산(聚散)의 땅에 앉아 묵묵히 꽃을 피워내고 뿌리로 사는 것, 행복이라 여겼다 튼실해진 가지들 사이에서 가끔 중얼거리듯 노래 할 뿐 손발이 터지도록 거름이 되고 울타리가 돼주었다 마당에 분꽃 앞 다투어 피던 날 꽃 아래 퍼질러 앉아 울던 여자 그녀를 지키려다 눈두덩이 시커멓게 부풀어 오른 나도 까만 눈물을 떨구었다 올해도 저렇게 분꽃이 피었구나 울어야 할 일이 또 있기라도 하듯 *시집/ 차차차 꽃잎들/ 애지출판 쑥부쟁이 - 김말화 야야 성욕은 참아도 식욕은 못 참는데이 감동이 가슴으로 오면 예술이지마는 아랫도리로 오면 외설 아이가 내사마 주..

한줄 詩 2020.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