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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옆 김밥집 - 김요아킴

목욕탕 옆 김밥집 - 김요아킴 -금곡동 아파트 독서실 의자에 붙잡혀 있다가 수제비로 허기를 달래는 딸아이에 아비는 김밥 한 줄을 더 보태었다 서로의 어깨가 연골처럼 부딪히는 자리, 무작정 밀치고 들어와 고집 묻어나는 쇳소리로 주문을 거는 노인들 불조심 마크 선연한 모자 속 땀내가 국물처럼 피어오르자, 배배 꼬인 면발이 태극기마냥 젓가락에 나부꼈다 서로 다름을 모두 붉은 낙인으로 찍어대던, 분노는 배고픈 북쪽의 일용할 양식이 될 쌀 한 톨에까지로 이어졌다 김 속의 밥알을 곱씹다가, 딸아이는 그 빨간 깍뚜기를 집다 말았고, 아비는 서둘러 잔돈을 지갑에 구겨 넣었다 거리에 찍힌 무수한 발자국, 그 무게와 모양이 각기 다르다는 걸 딸아이는 처음으로 교과서 밖에서 배우고 있었다 *시집/ 공중부양사/ 애지 수정탕에..

한줄 詩 2020.09.09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 이운진 시집

가능하면 천년의시작에서 나온 시집은 빼 놓지 않고 읽는다. 모든 시집을 내 것으로 만들 순 없지만 애정을 갖고 주목하는 출판사다. 만든 이보다 쓴 이에게 더 눈길을 줘야 마땅하지만 그래도 메이저 출판사 빼고 가장 활발하게 시집을 내고 있어서 다행이다. 가끔 함량미달의 시집을 만날 때면 난감하지만 그건 시 읽기에 미숙한 나에게 책임이 있다. 난감함을 무심함으로 바꾸고 나와 인연이 없는 시인이려니 그냥 스쳐 지나가면 된다. 좋은 시와 나쁜 시의 경계 또한 하늘에 긋는 선처럼 모호해서 부질없다. 그저 나는 아무 감명이 없고 가슴에서 헛돌기만 하는 시를 열심히 해설하는 평론가들에 감탄할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시 읽는 기술도 있는 모양이다. 이 시집은 지나쳤다가 우연히 다시 만난 시집이다. 내가 만든 표현으로는..

네줄 冊 2020.09.08

파란 달 - 이운진

파란 달 - 이운진 기억을 허문다 내가 온갖 죄를 지은 저 아름다운 시절과 돌림병 같던 청춘을 헐어서 기억으로도 돌아갈 곳이 없어졌으면 하고 어느 날 내가 당신을 처음 알던 백일홍 나무 아래 서 있을 때 갓 핀 꽃송이가 먼저 알고 반겨도 나는 처음인 듯 슬펐으면 가장 어두운 눈 속에서 가장 밝은 당신이 사라질 때 한 날에서 다른 날로 옮겨 가듯 무심히 아팠으면 얼굴이 없는 나를 만났을 때도 밤보다 깊은 문장을 잃었을 때도 눈만 가만히 감았다 뜬 채, 지나간 시간을 허무는 그런 밤에는 눈물이 울다 간 자리에 파란 달이 뜬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옛 일기장을 찢으며 - 이운진 서랍 속에서 낡아버린 일기장을 읽다가 찢어버린다 젊음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초라한 청..

한줄 詩 2020.09.08

망각 - 조성국

망각 - 조성국 자기공명단층촬영 필름에 새겨지듯 왼쪽 측두엽과 후두엽의 일부가 깨져 하야한 녹처럼 부종이 슬었다 말투 어눌하고 기억도 아렴풋해서 생각이 안 났지만 기억이란 그렇다 깨진 기왓장 가루 빻아 포름히 녹슨 놋그릇 짚수세미로 문질러 닦으면 번쩍번쩍 광이 슬어 얼굴 얼비치듯이 아무것도 잊히지 않는 기억의 처방약 장기간 복용해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는 것, 신경외과 의사 치유 용법대로 되살아날 수 있는 것이라면 한 가지 단 한 가지만, 일테면 설령 누군가 그 한 가지에 대해 말을 꺼내더라도 처음 듣는 이야기마냥 귀가 쫑긋해지는 것 이것에 대해서만 기억나지 않았으면 했다 밝고 빛나는 기억의 저편에 탁하고 추하고 속악한 것 내가 척지고 등 돌리고 원수졌던 것 되살아나지 않았으면 하였다 *시집/ 나만 멀쩡..

한줄 詩 2020.09.08

소수자들의 삶과 기록 - 윤수종

세상엔 존재하지만 없는 듯 취급 받는 사람이 있다. 소수자들이다. 그들은 다수자에 밀려 소외 받거나 차별 받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책을 쓴 윤수종 교수는 오랜 기간 소수자들의 삶을 기록한 연구자다. 이런 연구일수록 빛이 안 나기 마련인데 꾸준하게 이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학문을 출세의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기에 하는 말이다. 남이 안 가는 길을 걷는 일이 고단하기는 해도 이런 학자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이 책은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 소수자들의 삶을 기록한 내용이다. 탈성매매 여성, 병역거부자, 영창근무자와 수용자, 장애인, HIV 감염인, 성소수자 부모 등,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특별히 소외 계층에 관심이 없으면 잘 읽히지 않은 내용이다...

네줄 冊 2020.09.07

몸의 명상 - 백무산

몸의 명상 -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날에도 배는 고파 뭘 먹을까 이리저리 머리 굴리고 이렇게 슬픈 날에도 죽은 자 앞에서 갈비탕에 수육 접시 맛있게 비우고 이렇게 개 같은 날에도 좀 전에 배불리 먹은 밥은 간데없고 뭘 먹지 식당 골목을 기웃거리고 종일 한 일이라곤 지워버려야 할 일과 밥 먹은 일밖에 없는 날에도 절박함에 답을 찾아야 할 머리에는 식욕이라는 김이 뿌옇게 서려오고 먹는 일 때문에 통증도 무디어지고 머리에 끓어오르던 피는 위장으로 콸콸 흘러가고 아무리 유치해져도 다 그런 거지 뭐가 되고 그 유치함이 고뇌를 웃기게 만들고 허기가 저 높은 곳을 슬슬 비웃고 사는 것은 내가 아니라 식욕인 것인지 식욕의 신전에 하루 서너번 머리 조아리고 슬픔의 끝에서 몸이 분해되다가도 고뇌의 회로에 갇혀 과열되다가도..

한줄 詩 2020.09.07

저녁, 외딴집 - 김성장

저녁, 외딴집 - 김성장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여든 노인의 때 전 머릿수건 들판의 헤게모니가 바뀌는 시간 노인이 뒷모습을 보이자 벼가 익는다 강 쪽으로 줄지어 선 집들, 빈 것들 방의 허공은 그나마 남겨두고 떠난 사람들, 빈것들 마을의 북쪽 떠나면서 상념이 더 길어졌다 골짜기의 음산이 노을에 끌려온다 바람은 문을 닫으며 초저녁 뒤로 사라진다 새들이 들판의 고요를 접는다 떠나면서 거미줄 잠금장치 하길 다행이지 노인이 방문을 열자 덜컥 낡은 구루마 바퀴 빠진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처마 아무 참견하지 않는다 이제 간섭은 이 근처에서 사라진 현상 헛간에 걸린 낫이 회고록의 새로운 필진이 되었다 표지엔 붉은 녹이 가득하다 들킬 것도 없는 내면의 풍파 늙는다는 건 말라간다는 것 익는다는 건 푸석해진다는 것 오래된..

한줄 詩 2020.09.07

근대 장애인사 - 정창권

참 좋은 책 읽었다. 이런 책이 많이 팔릴 리 만무하고 또 연구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1등보다 2등에 더 눈길이 가고 주류보다 비주류의 길을 걷는 사람을 좋아한다. 모두가 인싸가 되기 위해 몰려다니지만 세상엔 인싸만 사는 것이 아니다. 지은이 정창권 선생은 장애인 연구를 오래 하신 분이다. 예전에 를 읽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 이후에도 몇 권의 좋은 책을 냈으나 이 책 외엔 읽지 못해 아쉽다. 어쨌든 이 책은 장애인 연구의 결정판이랄 수 있다. 불경과 성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세상에 나온 사람은 모두 소중하건만 실제 그렇던가. 이 책은 옛 문헌에 나온 장애인 기록과 근대에 들어 더욱 핍박 받으며 살았던 그들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장애인이라는 호칭은 최근에 만들어졌다. 1900..

네줄 冊 2020.09.03

부에노스아이레스, 동경, 서울역 - 강민영

부에노스아이레스, 동경, 서울역 - 강민영 막차 뒤에 다른 세계가 열린다 뭉글뭉글 밀려오는 포복한 기운들 냄새가 바짝 따라간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동경 서울역 바닥을 칠 때에야 찾게 되는 바닥 마지막 하나를 남긴 노숙은 의외로 가볍다 혼자 들어앉은 굴속, 강 건너 네온사인은 강 건너의 일 호루라기 신호가 규칙이다 침 뱉은 빵을 던져줘도 분노하지 않는 흐린 눈으로 느릿하게 돌아누우면 성공이다 뭉개고 짓밟아도 매일 발기하는 노숙 부에노스아이레스 동경 서울역 그 도심의 끝에는 이른 아침 갠지스강처럼 어제가 부산물로 떠다닌다 침묵하는 도시 수십 개의 세계 수천 개의 섬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돌사막 - 강민영 내가 지나온 사막에는 한 떼의 낙타 뼈조차 보이지 않는다 별똥별에 발끝..

한줄 詩 2020.09.03

거울이 있는 병실 풍경 - 조현정

거울이 있는 병실 풍경 - 조현정 소리 없는 비명의 날들은 언제나 삶을 잘 여미기도 전에 찾아온다 아무 상관없는 것이 있을까 나와 얼굴이 같은 민머리 여자 동굴처럼 성가시게 입을 벌리고 그르릉그르릉 울고 있다 목에 박힌 관을 따라 들어간 호스 서리꽃 핀 나뭇가지 사이를 돌아다니며 몸속을 긁고 있다 사랑에 발등 찍혀 절절매었느냐 막차가 끊어진 정거장 서성대다 매운바람에 눈물 떨구던 날 있었느냐 날이 밝으면 어린 자식들은 누군가의 손을 잡고 노란 승합차를 기다려야 하는 한낱 하품 같은 것들이 서러운 눈알을 굴리며 지나간다 저 멀리 눈발을 헤치고 사람의 눈동자를 가진 독수리 한 마리 거울 속 깊이 고랑을 내어 피 묻은 깃털의 뿌리를 심었다 머지않아 펄럭이는 날개 틔우리라 그녀의 넘어갈 듯 걸쳐진 눈동자에 아스..

한줄 詩 2020.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