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홍시 - 김인자

마루안 2020. 11. 27. 22:18

 

 

홍시 - 김인자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다면
저렇듯 농익을 수는 없을 거고
제 존재가 뭉개지는 걸 두려워했다면
고공에서
저토록 가뿐히 뛰어내릴 수는 없을 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내려놓는다는 것
돌려준다는 것
그곳이 본래의 자리인양
두려움도 초조도 없이
뛰어내려 본 자만이 아는
바닥의 안온함


*시집/ 당신이라는 갸륵/ 리토피아

 

 

 

 

 

 

낭만에 대하여 - 김인자


음악이 흐른다면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 같은 거겠지
방파제가 보이는 2층 등대다방에 앉아
쌍화차를 시켜야 하나 망설이다 커피를 시켰다
대체 얼마만인가 불륜처럼 달착지근한 이 맛
갈매기 따라 김 양도 박 양도 떠나고 없는
지금처럼 낯설고 옹색한 여백에 홀로 놓여질 때
영화 속처럼 담배라도 한 대 꼬나물면 딱이겠으나
그도 여의치 못하니,
내 꼬라지 그러하므로 일찌감치 여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어디서 굴러먹다가 예까지?
나만큼 늙은 여주인의 눈빛이 그리 묻고 있었지만
그런 당신은? 하고 맞장 뜨지는 않았다
아랫목에 가방을 던져놓고 빛바랜 커튼 사이로
쪽창에 입술을 뭉개며 저무는 바다를 보고 있는데
주책이다 무슨 눈물바람이람
동해에선 정말 바다밖에 볼 것이 없는 걸까
오늘 밤 여관주인과 외간남자가 한 판 놀자하면
처음에는 조금 빼기도 해야겠지
그러다가 에라 모르겠다 잔을 받고
한 곡조 권하면 뭘 부를까 침까지 꼴깍 삼키고 있는데
문밖의 저 알코올 냄새 설마 도라지 위스키는 아니겠지
마시지도 취하지도 않고 나는 열창에 열창을 거듭했다
나앙마네 대하여어~ 그것도 질퍽한 탱고 버전으로
나 정녕 노랫말이 전하는 생의 비의 따윈 아는 바 없지만
오면서 자동차가 말썽을 부려 삼거리카센터에서
작은 부품 하나 교환한 건 그나마 잘한 일이다
낯선 곳에선 한 번쯤 속아주는 것이 예의일 것 같아
순정부품이냐 따지지도 확인하지도 않았다
한 해의 끝자락, 그렇게 멋대로 달려서 도착한 동해바다
어디서 그가 보고 있다면 자유도 무엇도 못 되는 나를 측은해 할까
멀쩡한 남자를 걷어차고 낭만 운운하며 길을 떠나
고작 비린내 진동하는 선창가나 기웃대는 한심한 여자를
내가 아니면 누가 거둬 줘?
그래서 더욱 진하게 보듬어 줄 수밖에 없다고
이젠 그렇게 속삭여 주지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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