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푸른 물방울 - 안상학

푸른 물방울 - 안상학 내가 살아가는 지구(地球)는 우주에 떠 있는 푸른 물방울 나는 아주 작은 한 방울의 물에서 생겨나 지금 나같이 아주 우스꽝스럽고 조금 작은 한 방울의 물로 살다가 다시 아주 작은 한 방울의 물로 돌아가야 할 나는 나무 물방울 풀 물방울 물고기 물방울 새 물방울 혹은 나를 닮은 물방울 방울 세상 모든 물방울들과 함께 거대한 물방울을 이루며 살아가는 나는, 지나간 어느 날 망망대해 인도양을 건너다가 창졸간에 문득 지구는 지구가 아니라 수구(水球)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끝없는 우주를 떠도는 푸른 물방울 하나 *시집/ 남아 있는 날들은 모두가 내일/ 걷는사람 생명선에 서서 - 안상학 이쯤일까 생명선 어디 이순의 언저리에 나를 세워 본다 앞으로 남은 손금의 길 빤하지만 늘 그랬듯이 한 치 ..

한줄 詩 2020.11.26

십일월 - 허연

십일월 - 허연 십일월에 나는 나쁘게 늙어가기로 했다 잊고 있었던 그대가 잠깐 내 안부를 들여다본 저녁 창문을 열면 늦된 날벌레들이 우수수 떨어지곤 했다 절망의 형식으로 이 작은 아파트는 충분한 걸까 한참을 참았다가 뺨이 뜨거워졌다 남은 것들이 많아서 더 슬펐다 낙타가 몇 번 몸을 접은 후에야 간신히 땅에 쓰러지듯 세월은 힘겹게 바닥에 주저앉아 실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 서쪽으로는 노을이 재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육군 00사단 교육대 기다란 개인 소총을 거꾸로 들고 내 머리통을 겨누었다 십일월이었다 어머니 도와주세요 미친 듯이 슬펐는데 단풍은 못되게 아름다웠다 신전 같은 산 그늘이 나를 덮었고 난 죽지 못했다 늙고 좋은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은 젊었을 때만 좋았다 십일월이 그걸 알려줬다 *..

한줄 詩 2020.11.23

백발이 아름다운 이유 - 이강산

백발이 아름다운 이유 - 이강산 빠른 길 피하려 샛길 돌아간 보은군 마로면 나무의 머리카락이 희다 한 잎 남김없이 손을 턴 나무는 저만큼 보아도 나무라는 듯 일가를 이루었다 문 닫힌 마로면 우체국 앞에서 내 그림자와 악수를 나눈 시인의 머리카락도 희다 귀밑이 하얗게 늙어버린 낱말 몇 분, 겨우내 아랫목에 내주고 월동한 탓이려니 그리하여 시인도 저만큼부터 한 그루 나무다 말하자면 그런 까닭이다 매일 밤 시인을 비우고 읍내로 귀가하는 시내버스의 머리가 희끗희끗 나부끼는 것은, 새까맣게 백발이 무르익는 것은 어느 땐가 교목의 예감으로 생의 순간순간 아낌없이 손을 비운 탓이려니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즐거운 예감 - 이강산 먼먼 석기시대엔 비둘기호를 타기도 했지만 광속의 세월에 이보다 더 느릴 ..

한줄 詩 2020.11.23

노을 끝에서 - 김상렬

노을 끝에서 - 김상렬 아름다운 날들이여, 이윽고 해가 진다. 하루가 가고 한 생애가 타버린 노을 끝에서 나는 비로소 그리운 고향 앞에 선다. 부르지 않아도 달려오는 저 황금 파도, 그대는 무슨 영혼의 채찍으로 나를 삼키려는가. 회돌이 치는 피의 격정, 거대한 주름살로 망각의 숲에 가려진 낯익은 길들을 일으키며 생명의 고리, 빛의 둥지로 나를 이끄는 노을은 노랗고 희푸르며 검붉은 영원회귀로 춤춘다. 끓는 수평선의 몸부림이 나를 숨 막히게 한다. 사랑하는 날들이여, 서녘바람이 뜨겁다. 그 빛의 칼날을 물고 잔뜩 부풀어 오른 바다는 진정 거룩한 침묵, 눈부신 신(神)의 손짓, 밤으로 가는 진통은 왜 저리도 황홀한가. 심장 속 먼동이 터지는 내일 새벽까지 나는 이대로 잠들지 않는 그리움이고 싶다. 노을의 노을..

한줄 詩 2020.11.23

침묵 - 김옥종

침묵 - 김옥종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던 참새의 통곡소리와 어깨 넓은 봄동의 움츠러드는 가슴을 보고서도 그저 너희들끼리 잠시 견디어 내라고, 사랑하는 일보다 살아가는 일이 더 힘겹게 느껴지는 날에 가끔은 나를 침묵 속에서 잠방대는 겨울의 맨살 밖에 소름으로 방치해두고 싶다 돌아올 것 같지 않은 계절도 오후 한때 부서지는 햇살의 파편으로 체온을 끌어 올리고 있고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사람과의 생채기도 덧나지 않기 위해 침묵하고 싶다 그믐에 살이 차오르던 갯가재가 보름달이 뜨면 왜 살이 빠지는지와 민들레가 홀씨를 매마른 땅으로 왜 날려 보내는지 살점을 저며 내며 붉은 심장을 밀어 올리는 동백꽃이 왜 창백한지와 더듬던 네 속살에 박힌 봄이 아직 오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싶다 *시집/ 민어의 노..

한줄 詩 2020.11.22

늦가을 답변서 - 이서화

늦가을 답변서 - 이서화 살다 보면 참 답(答)은 모르겠고 변(辯)을 해야 할 때가 있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말들로 가능한 것들이지만 답변은 어디선가 데려와야 하는 것들이다 늦가을 붉은 단풍나무 가지 뚝 분질러서 쓱쓱 쓰고 싶은 뜬금없는 답변서 작성 막막한 답변 한 장 쓰면서 가을비가 말아 올린 하늘을 보면 산 능선 위로 분리수거한 듯 떠있는 구름 빌딩 위에 떠있는 광고풍선은 뚱뚱한 바람을 넣고도 잘도 떠있다 사실인 것들의 대답은 늘 빠르고 어느 귀퉁이에서는 부정의 대답으로 들려오고 답변을 하기 위해 마른 혀끝을 궁리로 적시는 시간 질문은 안 보이고 답변의 말투는 중고딕 말투이다 쌀쌀해지는 날씨의 답변은 화려하게 피는 꽃이다 그의 생각은 쉼표가 없고 또 다른 답을 기다리는 사이 구름도 어느새 고딕체..

한줄 詩 2020.11.22

어느 늙은 가을꽃 - 박용재

어느 늙은 가을꽃 - 박용재 지난 시절 사랑을 잃어버린 꽃들이 툭 툭 툭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미시령 아래 들판을 지나다 만난 구절초 몇 대궁 아름답던 추억도 꽃잎도 말라비틀어지고 있구나 *시집/ 꽃잎 강릉/ 곰곰나루 느닷없이 - 박용재 널 사랑했다 느닷없이 외딴 해변에 핀 갯메꽃 한 송이 60세에 너에게 깊은 눈길을 주었다 그게 전부였다 느닷없이, 지친 몸이 60세 - 박용재 눈앞의 빛을 쫓다 그 빛을 만든 어둠의 슬픔을 보지 못했네 그 어리석음에 내 살을 찢으며 나를 비웃는다 *시인의 말 숨을 쉴 때마다 고맙다 생각하면 모든 게 소중하고 숨을 쉴 때마다 괜찮다 여기면 모든 것이 위로이고 숨을 쉴 때마다 다행이다 생각하면 모든 게 행복하고 숨을 쉴 때마다 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면 그 무엇이 부럽겠는..

한줄 詩 2020.11.21

가을에서 봄에게로 - 이태관

가을에서 봄에게로 - 이태관 이슬이 눈물이었다는 듯 떨어져 내리는 낙엽, 그 순간의 무게가 가을을 저물게 한다 눈 뜨는 햇살은 그 눈물 불러 모으시는 어머니 밤새 가라앉은 고요가 서서히 풀려나온다 허리 펴는 강물 위로 안개 자욱하다 무겁던 나무 그늘 사이로 햇살 보이면 얽히고설킨, 겹치고 겹친 생의 이면이 조금은 환하다 흰머리 늘고 머리카락도 조금은 느슨해지는 시절 비로소 사람을 안다 보지 않으려 해도 바로 보인다 주름과 살에 한 생이 담겨 있다 나와 닮은 이여 평안하시라 쑤시는 삭신 고달픈 몸을 지나 꿈에서라도 행복하기를 그리고 흰 눈 내리는 날 두 발길이 하나가 되어 새순 돋는 추운 계절에 그대 입술에 닿는 그해 마지막 흰 눈송이이기를 *시집/ 숲에 세 들어 살다/ 달아실 침향 - 이태관 저 나무, ..

한줄 詩 2020.11.21

파장 - 이돈형

파장 - 이돈형 일이 끝나도 끝나지 않은 일로 고요한 상자처럼 남아 있다 쌓여 있는 물건을 거두며 스스로 허리를 꺾듯 서둘러 격려하듯 하루를 트럭 위에 싣는다 네게서 흩어진 저녁이 입을 오므린다 어디까지 왔니, 어디까지 왔니, 온종일 밀린 기분으로 걸음이 빨라지는 너는 사람들이 휘저어놓은 일렬횡대의 짧은 곡선을 휘잡아 일시에 내일로 보내는 너는 아득해도 파장 입에 물려 있던 벌판처럼 펼쳐놓았던 바닥을 쓸며 휩쓸려 가는 입을 식힌다 예감이 사라진 짐칸의 노끈처럼 '언제가'로 채워진 바닥은 영문도 모른 채 이쯤에서 어둠과 뒤섞이고 이동하는 저녁은 불빛이 없다 씻기듯 씻어내도 흔한 어둠과는 다투지 않는 사람처럼 시동을 걸고 있는 너는 어디까지 가니, 어디까지 가니, *시집/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한줄 詩 2020.11.21

각자도생 - 박태건

각자도생 - 박태건 검은 옷을 입은 날이면 슬픈 소식이 먼저 온다 환절기에는 귀가가 늦고 사무실 문 앞의 김영혜 선생님은 이십 년째 같은 자리다 퇴근할 때 힐끗 보니 책상에 엎드려 있다 나는 봉투를 챙겨서 조용히 나온다 검은 옷의 주머니에는 수치심에 젖은 손이라든가 실연한 연인의 속눈썹 같은 것이 들어 있어서 옷장 속의 검은 옷은 아무리 반듯하게 걸어 놓아도 어딘가 한쪽은 기울어 있다 *시집/ 이름을 몰랐으면 했다/ 모악 비닐봉투 - 박태건 그날이 오면 비닐봉투를 산다 비닐봉투에는 무엇이든 넣을 수 있으니까 술과 말린 꽃과 그리고 행복했던 추억 몇 장, 술을 따라 놓고 생각에 잠기다 참, 술은 못 드시잖아! 그보다 나이가 많아진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며 그가 좋아했던 음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각자 생..

한줄 詩 2020.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