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생활의 북쪽 - 안숭범

마루안 2020. 11. 28. 19:33

 

 

생활의 북쪽 - 안숭범

 

 

사진을 반으로 접자 절취선 저편으로 숨는 얼굴
고장 난 손목시계와 함께 멈춘 시간
엊그제 판 명함에서 벌써 방을 뺀 글자들
안목 없는 남편을 둔 여자는 벌써 어머니가 되고


사랑이 나를 할 수 있을까


옮기기 위해 발명된 직장이어서
깎이기 위해 계산적으로 자란 손톱과 봉급이어서
생활의 북쪽에서 서정시와 욕설이 서로를 허락한다


어제처럼 저녁이 바지춤을 내렸는데
도시의 음모를 전에도 본 적 있어서


이렇게 지는구나, 사람들아


과연 참혹하게 아름다운 영화였고
가이사에게 줄 가이사의 것을 찾다가
사랑에 져 주던 마음이 진다

 


*시집/ 무한으로 가는 순간들/ 문학수첩

 

 

 

 

 

 

무교동 - 안숭범

 

 

너는 그런 때 세기말을 말했고
나는 한 종교를 잃었다


아직 작별 중인 사람들이 여기 아닌 곳에도 많다고
생각했다, 생각이란 것을 해내야 했다
매미가 사라진 후에도 어떤 매미 울음은 몇 개의 계절을 살아 내고
종교가 사라진 이후에도 신앙은 영원을 견주곤 한다
수천의 저녁을 마신 표정으로
나를 떠난 농담들이 영영 고향을 등진 줄 알면서도
여긴 사람이 버린 사람들이 사람을 벼르는 거리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음악을 함부로 담던 네가
유난히 세게 말하던 날에 다시 이르고자 하면
나는 한 줌 먼지들이 먼지가 아니었던 시절을 사랑하게 된다
나와 오늘은, 무교동 은행나무에 옹이로 숨던 상징처럼
초겨울 진열대 위에서 추위를 견디려 둥글어진다


그때 네가 움켜 딴 마지막 말에
신앙에 매달린 기적이 기울어지는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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