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벼랑 끝에 잠들다 - 이수익

마루안 2020. 11. 29. 19:08

 

 

벼랑 끝에 잠들다 - 이수익


이젠 떠나가리, 믿고 약속했던 허망한 욕구여, 슬픔이여

나는 잠들어
저 높은 하늘 끝 벼랑 위에
편안한 휴식의 자리처럼 황홀하게도 부풀어 올라

안온하게 꿈꾼다
저녁별처럼 찬란하게 빛났던 저 어둠 한가운데에서
끝내 나는
백비(白碑)를 세우리

여름 지나면 가을, 가을 지나면 겨울,
그리고 봄,
나는 죽음에 길들지 않은 견고하고 투명한 입자가 되어
하늘에 섞일 것이다, 따로 또한
같이

너무나도 많은 빚 과분하게 져서
돌로 머리를 깨뜨려도 피처럼 살아 있을 평생의 죄

머얼리 구름에다 띄우고
나의 이력(履歷) 분분히 흩어져 갈 때

잘 가라, 믿고 약속했던 허망한 욕구여, 슬픔이여,
그리고 새로움이여


*시집/ 조용한 폭발/ 황금알

 

 




모서리가 불안해 - 이수익


회양목 집단이 화단을 둘러서 가고 있다
자라는지 마는지,
늘 고만고만한 것들이 아랫도리를 적시고 있다
키가 큰 감나무와 대추나무, 장미, 배롱나무는 하늘 끝으로
날개를 펼친 듯이 날아오르고
아파트 계단을 향해 수상한 냄새를 퍼뜨린 듯 퍼져나가는
적막의 냄새만이 그득하다
오후 3시면 조그만 자전거를 타고 우편배달 하는 체부는
오늘따라 무소식이어서 무슨 변고가 있는지 잠시 의심해보는 것인데
환한 그림자 속에 늘어선 부동산 중계업소, 약국, 제과점, GS25 등은
할 일이 없어서 그저 입안이 심심하다
회양목 집단이 슬그머니 내려다보는 지금
이 세상은
이렇게 무사한 하루로 남는 것도 제법 기분 좋은 일만 같은데

어찌할까, 한가롭게 뻗어 있는 나의 등허리 어디쯤인가를
날카롭게 찔러오는 일침(一針)
비수 하나!




# 이수익 시인은 1942년 경남 함안 출생으로 서울사범대학 영어교육과를 졸업했다.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울한 샹송>, <야간 열차>, <슬픔의 핵>, <단순한 기쁨>, <그리고 너를 위하여>, <아득한 봄>, <푸른 추억의 빵>,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 <꽃나무 아래의 키스>,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 <천년의 강>, <침묵의 여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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