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심인성 - 전형철

마루안 2020. 11. 28. 19:43

 

 

심인성 - 전형철


척수 눌린 짐승처럼
누워 있었다

차라리 몸의 병이 낫겠다 싶었지만
겁먹은 거미들과 며칠을 뒤척이는 동안
몸에 하나둘 돋아나는 두드러기들

구멍 난 옷의 구멍을 풀어 주고 싶어
구멍을 따라 옷을 찢는데

별일 없었다는 말에 무의식이라 답하는 의사
별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려 한다는 그 반대편

사람은 다 석판이 되어 가는 거란 생각
음각과 양각이 정과 칼의 소산이 아니고
마음의 마른 뿌리혹으로부터
천년 비문(碑文)처럼 인양되었다는 생각

주머니에 라이터와 몇 톨의 약을 품고 다닌 날들
속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본 적이 없지 않았나 하는

내 몸에 얼굴 같은 게 담겨 있다
연중무휴 기사식당처럼


*시집/ 이름 이후의 사람/ 파란출판

 

 

 

 


태몽 - 전형철


벗어 놓은 속옷을 보며 생각한다
태어나서 가장 많이 내 살을 만진 건 엄마가 아니지
몸집이 커지며 문기둥에 키를 적어 두는 이야기는 대처에 나와 처음 들었지
검은 비늘이 쏟아진다
파충(爬蟲)의 사나움은 허물을 벗는 데 있지
늪에 사는 가물치나 고무 다라의 가물치나 둥근 지구에 던져진 가물치나
북극성으로 머리를 두고
머리는 뱀을 닮고
아가미를 뻐금거리던 시절과
공기로 호흡하는 폐
검은 비닐이 쏟아진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을 상징으로 만든 꿈
치마폭 한 마리 가물치로 태어난 나는
강 속을 후벼 먹는 수달처럼 살았으니
가물치는 먹는 게 아니고
가물치는 파충류가 아니고
가물치는 내가 아니고



 

*시인의 말

 

다른 창문 너머 하늘을 그녀도 보고 있을 것이다. 저녁밥을 소분하다 말고 다시 한 명 분의 삶을 덜어 낸다. 가혹한 이름들의 귀퉁이가 부서져 내린다. 명명(命名)과 명명(明命) 사이에 명멸하는 바깥을 오래 자책한다. 아주 오래전 별들에게 처음 이름을 붙인 이는 얼마나 적요로웠을까. 바람의 어깨를 토닥이며 세상의 모든 배후에게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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