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 이운진

마루안 2020. 11. 29. 18:53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 이운진


간혹 옛일로 잠 안 오는 날
나를 그렇게는 미워할 수 없는 일이라서
운명을 미워한다

태어났지만, 버려진 것이었던 가족사처럼
지상의 법으로는 단죄할 수 없는 일로
잠 안 오는 밤

혼자라는 말이 너무나 걸맞는 시간에는
구름 한 점으로도 가려지는
머나먼 외딴섬을 떠올린다

삶보다 친절한 바람과 바다 곁에서
아름다울 수도 있었을 내 이야기는 왜 아름답게 쓰이지 못했는지
왜 떠났다가 돌아오는 것은 사람들이고
같은 자리에서 기다리는 것은 내 몫인지
차가운 혀로 나에게 해명한다

말해 주어도 믿을 리 없고
믿는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난처한 생을 안고

어둠 속에서 다시 한 번
온 마음, 온 영혼, 온 힘을 다해
내가 슬픈 이유는 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시집/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천년의시작

 

 

 

 

 


11월의 끝 - 이운진


한 사람의 상처 입은 사랑을 덮으려면 저토록 많은 나뭇잎이 필요한가

우리가 한때 우리였다는 걸 말하려고 나무는 모든 잎을 버리나

애인아
어느 날 슬플 때
내가 네 이름을 부르는 억양도 나뭇잎만큼 바스락거리고
우리 사이에만 통하는 따스한 농담도
떨어진 잎처럼 바람에 찢기고 말까

죄가 되기에는 너무 아름답고 무해한 사랑처럼 낙엽이 진다

언젠가 꼭 잊혀질 우리처럼, 낯선 영혼처럼



 

# 이운진 시인은 경남 거창 출생으로 1995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모든 기억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타로 카드를 그리는 밤>,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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