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모르핀 풀어놓은 오후 - 강민영

마루안 2020. 11. 26. 19:29

 

 

모르핀 풀어놓은 오후 - 강민영


방에서 랜턴을 든 여행자를 꺼내줄 때가 되었다

청소기를 돌리고
아이들이 철없이 쿵쾅대고
끝날 것 같지 않던 밤이
가까스로 넘어갔다

그대로 죽게 해달라는 간절함과
어수선하게 쌓인 신발의 얼룩이
사방으로 흩어진 방

모르핀 풀어놓은 오후
엄마는 길게 잠들어 있다

편해졌을 때 버려야 하는 신발, 옷가지, 기명들
몸피에 맞게 늘어날 대로 늘어난 날숨
엄마는 눈부신 대낮에 그걸 벗었다


*시집/ 아무도 달이 계속 자란다고 생각 안 하지/ 삶창

 

 

 

 

 

 

지워지다 - 강민영


물비늘이 강을 밀고 올라오며 풍경을 지운다
안개 속에 납작 엎드린 마을

쌀 씻는 굽은 등이 어둠을 밀어내자
깨진 바가지 틈새로 바구미가 어른거리고
송아지 울음처럼
죽은 아기를 달래는 소리처럼
텅 빈 외양간이 운다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철골만 남은 다리가 보인다
버티는 건 기다리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빗방울이 제 무릎을 감싼 깍지를 풀면
윤슬이 되는지
돌이 된 얼굴과 흙이 된 얼굴이 오래전부터 있어
나에게 풍경이 되는 곳

몇 개의 기억이 미화되는 거기,
여전히 강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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