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붉은 여우를 위하여 - 백인덕

마루안 2021. 1. 6. 21:22

 

 

붉은 여우를 위하여 - 백인덕


길도 집도 없다, 당연하게 허방도 곡간도 없다. 방향도 목적도 없다. 그러므로 이웃도 원수도 없다.

해진 눈밭 구릉 위에서 
너는 울지만, 
언제까지 울 것인가? 

없는 영원도 만들어 그 끝까지 울 것 같은 
겨울 정신의 붉은 여우들 

변두리 한적한 지하철 계단 옆 늙은 도시의 데코레이션처럼 반쯤 빈 리어카 몇 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그 앞 포장마차에서 피워 오르는 훈기(薰氣), 한 잔이 종일 비었던 뱃속으로 흘러들리라. 아니, 그랬음 바라면서 장갑을 꺼내 낀다.

오늘은 책가방을 메지 않을 것이다. 

달빛 선연한 밤길에선 등 뒤로 솟아난 칼에 내가 먼저 소스라칠 테니 추운 날은 차가운 정신으로 달빛에 희미한 길을 그저 열심히 걸어가면 그뿐, 모르고 지나치는 자작나무 하얀 외피(外皮)에 서러운 이름 몇 개 새겨지든 지워지든 눈 한 줌에 목을 축이고 그저 걸어가면, 걸어가면 그뿐. 몇 개의 포장마차를 지나 수북한 쓰레기 위에 마른 가래 뱉고 길게 목을 늘인다.

없는 영원의 끝까지 달릴 것 같은 
겨울 정신의 붉은 여우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어떤 편지 - 백인덕


먼 땅에 
설핏 눈 내린다고 
축축한 말씀이 
어떤 반짝임도 없이 건너왔다 
어제 당신은 
저녁 굶주린 스라소니를 봤다 했는데 
여기 아침 골목에는 어김없이 
새끼 고양이가 죽어 있다 

물론이다, 
다 시든 장미넝쿨 아래 
쓰레기가 무단투기 되는 곳 
그리움이 지겨울 때마다 
누런 가래를 끌어 올려 뱉던 
내 무료(無聊)의 적소(謫所), 
한가득 내리지 않은 눈을 쌓아 올리며 
악취 위에 주워 온 연탄재를 던졌다 

물론이다, 
나는 밤새 골몰할 것이다 
오늘을 가득 채운 
불안과 절망의 숱한 반짝임을 
아무런 눅눅함 없이 날려 보내기 위해 
먼 땅의 빈 지번을 밤새도록 검색할 것이다
자기 뺨을 치고 
웃는 제 얼굴에 침 뱉을 것이다 

 



*시인의 말 

난독(難讀)과 비문(飛文)이 아니어도 
하얀 슬픔 같은 밤, 
노란 슬픔 같은 시를 만나고 싶었지만 
나는 자주 발목이 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