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달의 기억 - 허림

달의 기억 - 허림 음력은 생일이나 제사를 기억하거나 설이나 추석을 조바심 나게 기다리게 하는 것이다 나는 자꾸만 잊어버려 가끔 어둔 밤 달을 찾는다 달 속 엄마는 쇠락하였구나 소핵교 이학년이 학력의 전부인 엄마가 오늘이 음력 며칠이냐 묻는다 나는 달력의 일진과 음력 며칠이라고 달처럼 귀먹은 엄마한테 큰 소리로 천천히 들려준다 그래 그렇게 됐구나 달이 반달쯤 됐을 거다 이맘때지 달 속 엄마는 여직 앞치마 하고 방아 찧는다 끝날 거 같지 않던 날도 죽으니 다 가더라 더디 가더라도 가는 게 날이라고 달처럼 세상의 모든 날이 기억하는 엄마의 날들을 내가 묻는다 오늘이 음력 며칠이냐 혼자 묻고 밖으로 나가 하늘의 달을 본다 그래 오늘이 음력 초닷새쯤 됐겠다 모래쯤 술밥을 쪄야겠구나 *시집/ 엄마 냄새/ 달아실 ..

한줄 詩 2021.01.27

치아 상태를 점검하는 오후의 진료 - 손남숙

치아 상태를 점검하는 오후의 진료 - 손남숙 하찮은 것을 씹고 어리석은 마음을 질겅질겅 목구멍으로 넘기느라고 반쯤 절개된 구릉과 폐허가 된 동공이 있다 이와 잇몸 사이의 내력이 숭덩숭덩하다 오직 흑백의 진술로만 기록되는 몸 놀라워라, 나의 삶은 힘들게 빠득빠득 삼키고 게으르게 외면하며 부지런하게 파멸해 왔구나 끊임없이 실패를 연마해 온 결과를 어금니 빠진 자리가 움푹하게 알려 준다 어떤 고질적인 외침이 오후의 진료를 규명하느라고 녹아내린 뼈 위에 무슨 건물을 세울 것인지 아 입을 벌리세요 뜯어낼 미래가 아직도 남아 있다니 *시집/ 새는 왜 내 입안에 집을 짓는 걸까/ 걷는사람 걷는 사람 - 손남숙 걷는 사람은 천천히 사랑하는 사람 언덕의 바람을 마시고 들판의 향기를 저장하는 사람 시간을 가만히 멈추게 하..

한줄 詩 2021.01.27

생일선물 - 최세라

생일선물 - 최세라 달아나라 최대한 빨리 그래도 늦을 거야 너의 목에 소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달리다 지치면 이걸 핥아 다음 생일엔 사슴 농장을 선물해 줄게 (어려울 거야 뿔이 잘려지고 다시 만나다는 건)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는 나의 판단의 근원 예감 그리고 이 순간 너는 손이 미끄러지는 문고리 너머의 빈 방 어서 달아나 삼나무 어깨 위 검은 달이 숫돌에 물을 끼얹는 사이 하얀 시내는 검푸르게 휘어진 칼날이 되고 어느새 알게 된 핏빛 비밀처럼 뿔은 베어지고 말겠지만 나는 네가 여기 살았다는 유일한 증거 변론 멈출 수 없는 탄원 그리고 멀리 사라져 가는 너는 이 마을 모두가 뒤를 쫓는 현상수배자 잡히는 순간 다음 번 내 생일이 사라져 버리는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사라진..

한줄 詩 2021.01.27

그리웠다 - 김륭

그리웠다 - 김륭 내가 나를 놀라게 하거나 아름답게 할 수 있는 일에 골몰했다 또 어떤 날은 내가 나를 건드릴 수 없는 일을 찾다 보니 돌돌 말린 양말 속이었다 밤을 나눠 쓰던 애인이 나타나 뺨을 때렸다 나는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나는 전쟁이 될까 봐 기쁘고 용감한 마음을 군복처럼 꺼내 읽었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달래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무사히, 무사히 눈썹 하나 다치지 않게 그러나 등신, 천하에 둘도 없는 등신, 나는 오갈 데가 없었다 저 혼자 나를 떠들어대는 팬티처럼 달을 닫는다 나는, 밤은 가만히 그대로 두고 물끄러미 죽지 않았다고 사는 일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시집/ 애인에게 줬다가 뺏은 시/ 달을쏘다 떨림 울음이 울음을 밀고 있다 이미 죽었는데 아직 죽고 있다는 듯이 그..

한줄 詩 2021.01.23

당신을 설명하다 - 김대호

당신을 설명하다 - 김대호 당신을 완전히 이해하면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기에 우리에겐 아직 설명이 필요하지 낮과 밤을 설명해야 하고 너무 쉽고 너무 뻔해서 일부러 길을 우회하는 행로를 설명해야 한다 설명이란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 추가하는 달콤한 디저트 설명의 의미를 눈치챘다 해도 우리는 멈출 수 없지 기도해서 아무것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루한 기도를 멈추지 않듯이 당신의 설명을 듣지 않았다면 나는 드라마의 결말과 식탁의 반찬과 신발 밑창이 바깥으로만 닳는 이유 따위를 오해했을 것이다 어디까지 설명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문득 노안이 와서 당신이 아득하게 보일 때도 내가 당신을 어디까지 설명하다가 말았는지 기억나지 않았어 저녁을 설명하다가 폭소가 터지기도 했다네 통곡을 한 것이 ..

한줄 詩 2021.01.23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다 - 배정숙

무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다 - 배정숙 -슬럼프 그 집이 궁금하다 대낮에 벽에 머리를 부딪고 버럭 화를 내며 주인이 다녀간 뒤 몇 달째 어정쩡 비어있는 집 닫힌 문틈으로 평온을 가장한 햇살이 한줄기 비치는 듯 했지만 바람은 이내 흑단 같은 어둠의 머리채를 끌어다 놓고 사라진다 침묵의 부스러기들과 부재의 잔뼈들로 모자이크한 벽 저녁나절 내리던 빗물은 제 발목이 젖도록 귀도 늘려보고 까치발도 서면서 봄의 산도를 눈 빠지게 바라보고 있는데 무중력의 귀가 떠 다닌다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할 수도 그냥 양보할 수도 없이 파랗게 질려가는 입술에 무통주사가 듣지 않는다 쏘아보는 초침소리에 빨려 들어가 발을 빼려야 뺄 수가 없다 잠긴 목소리의 미세한 메아리는 벌써 허공이 먹어치웠다 하여 리트머스 시험지가 색깔이 다르게 반..

한줄 詩 2021.01.23

모란공원, 겨울 - 정기복

모란공원, 겨울 - 정기복 폭설 퍼부어도 쌓이지 못하는 도시의 진창 무릎걸음으로 지나 흰 바리케이드 칼날처럼 차단된 산 어귀에 다다릅니다 이곳은 야위게 살아도 슬픔 모르던 뜨거운 피 세상 밖으로 기꺼이 쏟아내던 시절의 수인들이 불끈불끈 허우대 썩히고 삭혀 스스럼없는 그림자로 거침없이 통방하는 동네 시린 눈발 모이 찾아 헤매던 검게 그을린 굴뚝새 몇 마리 폭설 견뎌 팽팽하게 휜 애기소나무 등에 와 앉습니다 문득 하늘 낮게 깔리고 칼바람 새들 통통통 날아오릅니다 덩달아 솔가지 활같이 튕겨올라 묵직한 겨울 퍽퍽퍽 털어냅니다 그 서슬에 온 산 쩌렁쩌렁 깨어납니다 *시집/ 어떤 청혼/ 실천문학사 모란공원, 가을 - 정기복 넋두리 판치는 세상 추태로 인한 부끄러움과 짙은 회한을 들꽃 묶어 바칩니다 지금은 메마른 단..

한줄 詩 2021.01.22

멀어서 아름다운 것들 - 신표균

멀어서 아름다운 것들 - 신표균 멀리 다녀온 따뜻한 빛이나 높이 모셔두어야 경외로운 신은 두말할 것 없이 섬을 삼키는 파도의 악다구니가 건반 위의 은파로 변환되는 것은 멀어서 아름답다 멀리서 그림엽서 보내오는 노을은 태양과 구름의 육탄전일 테지만 기러기 떼 노을빛 날갯짓 창천 물들이면 먼 곳의 그가 더욱 그립고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 꿈에 나타난다 닐 암스트롱 발자국 찍던 날 계수나무 아래 방아 찧던 토끼 혼비백산 사막 모래 구덩이로 사라진 후 총성 멎을 날 없고 근경은 전쟁이 되고 원경은 풍경이 되는 가보지 못해 발걸음 닿지 않은 곳 멀어서 아름답다 가까울수록 너무 먼 당신 품이 더욱 따뜻한 것은 *시집/ 일곱 번씩 일곱 번의 오늘/ 천년의시작 집시 또는 시집을 위한 집 한 채 - 신표균 꿈 찾는 사람..

한줄 詩 2021.01.22

생몰연대를 적다 - 안채영

생몰연대를 적다 - 안채영 뒤따라오는 운구차가 백미러 속으로 따라온다 사인(死因)으로 반사된 아침 해가 한동안 같이 따라왔다 사거리를 따라오고 다리를 건너오고 휘어진 길에서 잠시 투명한 반사를 벋어나자 이내 다시 나타나며 따라오는 운구차 화장장 표지판이 나타나고 당신이 지금부터 지나갈 자리는 이젠 불길이라고 붉은 아침 해 속으로 휩싸인다. 보자기에 싸인 따뜻한 우주를 들고 보면 진화가 멈춘, 진공 행성 공기를 다 뺀 유골함은 지지부진했던 하나의 우주다 물이었다가 불이었다가 작은 바람에도 날릴 것이지만 납골장 안 칸칸을 채우고 있는 둥근 행성들은 제각각 다른 생몰연대를 갖고 있다 그깟 우주 쯤 흐려지는 일은 빈번하고 사람들은 모두 무표정한 표정으로 둥둥 떠 있다 떨어진 혀들은 여전히 밀봉해두기로 한다 평생..

한줄 詩 2021.01.22

얼음은 칼날을 물고 사라지고 - 박승민

얼음은 칼날을 물고 사라지고 - 박승민 칼날이 얼음을 문 건지, 얼음이 복부 깊숙이 칼날을 받아 들인건지 알 수 없는, 얼음 속에 박힌 칼날 이 세상, 정말 사랑이라는 체위가 있다면 그렇다면 말이지, 자신이 박은 건지 박힌 것인지조차 모른 채 한생을 한나절처럼 늙어가는 것 무너지는 자기를 무연고 묘지처럼 지나치다가 이제야 생각난 듯 허겁지겁, 그 옛 자리로 돌아가 타들어가던 너의 마음, 이제 알겠다는 듯, 몰라도 알겠다는 듯 천천히, 괴롭게, 천천히, 괴롭게, 고개를 끄덕이듯, 칼날인 듯 얼음인 듯 번들거리는 녹슨 마음을 내 속으로 옮겨 놓는 일 그러나 뼈대의 형식마저 녹아내린 뒤, 둘이 닿았던 기억만이 전부이자 막다른 길목일 때, 누군가 웬 녹슨 물 자국이야! 툭 치고 지나갈 때, 칼날 속에 이미 꽉 ..

한줄 詩 2021.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