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제야(除夜) - 전영관

마루안 2020. 12. 31. 21:40

 

 

제야(除夜) - 전영관


달력 마지막 장을 넘겼다 
백지일 텐데도 뒷면을 보는 감정은 
미련의 합병증 

바퀴에 깔려 죽은 새는 
스스로 결정한 포기의 결과인지 
바퀴쯤 피할 수 있다는 자만의 파탄인지 
한 해의 취사선택을 복기했다 

달력의 칸은 단정해 보이지만 달걀가리일 뿐 
희망을 허망으로 오독했다 
내일은 버겁더라도 내 일이다 
어쩌다 술자리의 계산대 앞에 선 것처럼 
마지막엔 농담 같은 혼자였다 
우뇌는 괴사하고 
살아남은 좌뇌 하나로 버티느라 
치사량의 현기증을 혼자 앓았다 

다들 당하는데도 
희망이나 다짐 따위의 면식범들만 활개쳤다 
피 묻은 잇바디를 드러내며 배회했다 
제야가 그들의 대목인 것이다 
불신하지만 다들 구매하니까 
행복이란 사은품을 붙여놓은 
맘대로 며칠씩 지우고 잠적해도 되는 
일인용 달력을 들여놓았다 
숫자는 힘도 없는데 완강한 순서는 버겁다 

기념일은 사람이라서 부대낀다는 증거 
사람은 버리지 못하겠다는 애착 
손 찔린 선인장을 버리듯 묵은 달력을 버리면서 
독재자라도 된 양 몇몇은 회생시켰다 

슬픔은 짐작할수록 사나워지는 짐승이라서 
오지 않은 것들은 두려워하지 않기로 한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안부 - 전영관 


멀리서 보면 
울음과 웃음이 비슷하게 보인다 

타인은 관심 없고 
제 것만 강요하는 우리끼리 잡담한다 
겸손한 척 거리를 두는 습관을 
우아한 외면 혹은 비겁이라며 조롱했다 

우리들 하루란 
칭병(稱病)하고 누운 사람을 문병 가는 일 
잡아당겨보면 내부가 자명해지는 서랍처럼 
거짓말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 

돌아서 안녕이라 손 흔들어도 
우는지 웃는지 몰라서 편안한 거리를 
그대들과 유지하고 있다

 

 

 

 

# 전영관 시인은 충남 청양 출생으로 2011년 <작가세계>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바람의 전입신고>, <부르면 제일 먼저 돌아보는>, <슬픔도 태도가 된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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