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겨울을 지나는 법 - 조하은

마루안 2021. 1. 3. 19:21

 

 

겨울을 지나는 법 - 조하은


웅크린 이름이 달아날 곳 없다

개인회생 제6호 법정
아내의 원망과 아이들의 외면이 겨울바람을 타고 와
성공과 실패의 중간지대에 둥둥 떠 있다

단 한 번도 편히 뛰어보지 못한 심장
화석처럼 굳어지는 시간
몸을 세워주던 뼈들 뚝, 뚝 꺾이는 소리
한 개비의 담배 간절하다
말아 올린 연기 따라 하늘로 올라갈 수 있다면
멀리 달아날 수 있다면

좁고 길게 달려들던 이방인의 겨울은
한 겹 두 겹 두꺼운 외투를 벗는 동안
다시 사는 언어를 입을 수 있으려나

봄꽃이 떨어져 쌓이는 시간 봄은 잠깐 외출했다

치욕이라는 이름의 틈새에서
회생이란 단어 하나 받아들면
낙타 등처럼 구불구불하던 시간들
주춤주춤 물을 채운다


*시집/ 얼마간은 불량하게/ 시와에세이

 

 

 

 

 

 

독서의 기원 - 조하은


오라비는 둘둘 말은 선데이서울을 바지 뒷주머니에 반쯤 집어넣은 채 불쑥 나타나곤 했다 겉장이 나달나달해진 그 속에는 뭔지 모르지만 알 수 없는 간질간질한 것들이 숨어 있었다 가슴과 허벅지를 다 드러낸 여자가 다리를 꼬고 게슴츠레 풀린 눈으로 혀를 살짝 내민 채 나를 쳐다본다든지 머리를 빵빵하게 틀어 올린 흑장미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의 연재소설이라든지 가끔 친구들을 모아놓고 소공녀나 퀴리부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아이들은 그녀들의 컬러사진보다는 가슴 볼록한 여자들의 몽롱한 눈빛을 더 흥미로워했다

공사판을 떠돌던 오라비가 금방 책 속에서 나온 듯한 여자를 데려오면서 나의 은밀한 독서의 방은 문을 닫고 말았다 못다 쓴 일기의 마지막 장처럼 동공에 일렁이던 부호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없었다
 
마침표를 찍지 않은 문장은 끊임없이 흔들렸다
얼마간은 불량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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