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백장미 - 최세라

마루안 2021. 1. 7. 19:35

 

 

백장미 - 최세라


나의 넋이 나가겠지
불땀을 빼며 자주 혹은 아주 가끔씩

물을 마실 때마다
컵 속에 너울거리는 혀가 한 잎 또 한 잎

아주 끝까지 색을 빼는 것이겠지
네 안에 너 자신이 결핍돼 있는 것처럼
내 혀로 사랑을 부정하며 살아 왔다

불에서 걸어 나온 것들만 꽃이 되는 건 아니야

마지막 연탄불을 들어내는 날
숨이 턱 막히게 눈이 쌓인다면
그런 걸 꽃이라 부른다면
꽤나 괜찮게 동면하는 것 혹은 죽어가는 것

아픔은 평등하지 않아 
온몸에 돋친 가시로 눈을 가릴 때
목 위로 새하얗게 질리고 그 밑에 피가 고이는 순간을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요

내가 완벽했다면 당신을 사랑하겠습니까

우아하게 지는 법, 그게 일생 도달해야 할 지점인지도 모르죠


*시집/ 단 하나의 장면을 위해/ 시와반시

 

 

 

 

 

 

유리 - 최세라


최선을 다해 깨지고 싶었다

내가 유리창인 걸 그가 알 수 있도록
음이 높은 앵무새를 키웠다

애인은 투명하고  두께를 가지고 깨지기 쉽고
차가운 심장을 갖기 위해 창을 더듬는다

창문 끝자락엔 깜깜한 밤이 눌어붙어
손금을 문지를 때마다 별이 돋아 땅에 떨어졌다

우린 그런 방식으로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즐거이 탕진했다

아직 빛나고 있을까 우리가 떨군 별들
나는 잊은 체 했고 애인은 정말 잊은 것 같다

 

그것이 우리 사랑에 틈을 주는 일이라는 걸 주장하지 않고
아름다운 실패를 반복하게 했다

나는 우기에 있고 애인은 또 다른 우기로 건너간다

 

사포와 고양이의 혀, 각질이 가득한 여관 시트를 넘어
유리와 같은 온도의 시체처럼 누워

안쪽과 바깥은 이어지는 풍경이기 바라는 마음을 품은 채

나는 우기에 있고 애인은 또 다른 우기로 건너간다

앵무새는 누구의 말도 따라하지 않았다
무너진 눈시울을 들킬까봐 발끝을 만졌다


 

 

*자서

나의 말은 어둡고 혀는 둔탁하다.

 

어눌한 언어에 어색한 조우가 스며 시가 될 수 있다면

나의 길은 얼마든지 캄캄해도 밝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