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끝내, 보이지 않는 - 김윤배

마루안 2021. 2. 5. 19:20

 

 

끝내, 보이지 않는 - 김윤배


당신은 개미자리와 바람의 불륜으로 태어난 연민의 꽃

광활한 대지를 버리고 남극, 그 극한의 얼음 왕국에 숨어 있는 꽃이다

 

사랑은 사라진 뒤에야 믿을 수 있는 환상이 분명하다

바람은 당신을 찾아 지구를 몇 바퀴나 순회하며
때로는 부드러운 미풍으로 이름을 불렀을 것이고
때로는 미친듯한 광풍으로 이름을 외쳤을 것인데

당신은 바람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
남극의 동토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꽃으로 숨으려 했던 것
숨어, 세상에 없는 꽃으로 피어나려 했던 것

당신은 극점의 사랑을 노래한다

보이지 않는 몸으로 보이지 않는 몸의 방향을 어렴풋이 짐작할 뿐
보이지 않는 입술이 보이지 않는 눈빛을 더듬어
찰나의 뜨거움이 남국에서 있었던

그날의 백야를 기억하는 건, 환상일 뿐이어서

끝내, 보이지 않는


*시집/ 언약, 아름다웠다/ 현대시학사

 

 

 

 

 

 

황홀한 슬픔 - 김윤배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니까

연민하려 하지 말라는 문장은 고백이 아니라 경고였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세상의 창밖을 보고 있다
초연한 눈빛이 어두운 곳, 실의에 찬 미래에 오래 머문다

돌이킬 수 없는 허공이라고, 그렇게 단 한 번의 슬픔이고
불멸의 빛이라고 했던 말을 거두고 싶다

파멸이 오더라도
이해하려, 길들이려 할 것이고
연민 때문에 강을 건널 것이다

그게 불멸로 가는 길이니까

문장 한 행 한 행은 독약처럼 황홀하다
긴 잠에 든다 하더라도 서러울 일은 아니다

황홀한 슬픔을 알았으므로




# 김윤배 시인은 1944년 충북 청주 출생으로 한국방송통신대, 고려대 교육대학원 및 인하대 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6년 <세계의 문학>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겨울 숲에서>, <떠돌이의 노래>, <강 깊은 당신 편지>, <굴욕은 아름답다>, <따뜻한 말 속에 욕망이 숨어 있다>, <슬프도록 비천하고 슬프도록 당당한>, <부론에서 길을 잃다>, <혹독한 기다림 위에 있다>, <바람의 등을 보았다>, <마침내, 네가 비밀이 되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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