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이 땅의 시시포스 - 정기복

마루안 2021. 2. 2. 19:53

 

 

이 땅의 시시포스 - 정기복


시시포스가 신의 형벌이라면
이 땅의 택시 노동자는 소자본의 형벌이다
무너진 중산층의 가장
퇴출당한 지식 노동자
전문 기술을 익히지 못한 노동자가
쉽게 선택했다가 쉬이 벗어나지 못하는
바퀴의 형벌이다

우리의 노동은
팔과 다리만을 사용하는 단순노동인 듯하나
긴장의 연속으로 뇌세포를 지워나가고
무릎도가니를 깎아내고
망막을 혹사시켜 시력을 잃어가는
하루 12시간, 주당 72시간, 한 달 만근 26일로
닳아가는 시간의 형벌이다

우리의 바퀴는
일 년이면 78,000km 지구 두 바퀴를 도는
긴 여정이나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였고
지구 세 바퀴씩 십 년을 돈다 하여도
요원한 휴식과 안식의 뺑뺑이인지 모른다

문명과 문명을 시공간으로 잇는
바퀴의 역할과 운명을 믿어 의심치 않으나
이 땅의 바퀴 노동은
시시포스처럼, 스키드 마크처럼
깊은 주름의 골을 하나씩 그어가는
둥근 생애 전반에 걸쳐있다.


*시집/ 나리꽃이 내게 이르기를/ 천년의시작

 

 

 

 

 

와불 - 정기복


아하,
틈이 없다
모로 누운 채 시공을 빗겼다

포구에 버려진 그물망 뻘에 박힌 채 해 질 녘으로 묵히는지
개망초 뒤덮은 묵정밭 아까시나무 뿌리 내린 산비탈 되었는지
그 사연 알 수 없으나

지금은
종로 5가
여기 와 누웠다

해안가 굽잇길
호젓한 솔밭 산길
몇 날 며칠 서성였는지 알 수 없으나

햇살 푸르던 공장 담벼라도 기댈 곳은 아니었는지
쪽방과 편의점을 오가던 골목길 한 줌 달빛의 추억은 또 어찌하였는지

머물던 곳
떠돌던 날의
먹장구름 속 알 수 없으나

종로 5가
택시 정류장 쪽 의자에 와
비스듬히 모로 누웠다

묵언 수행,
떠돌이 중 하나 들이는가

언제부터 박혀 있는 벽화인지 알 수 없으나
며칠 전 모습 그대로
흐트러짐 없이 단아하고 단호하다

때 전 외투에 얼룩이 진 가방 베고
사타구니에 양손 찌른 채로
돌부처 하나 들였다

내 바퀴는
출발도, 가속도, 제동도
다 잊고
슬그머니 곁에 가 저처럼 미동 없이 눕고 싶다
한 개 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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