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 백인덕

마루안 2021. 2. 3. 19:35

 

 

시작은 벼락처럼 온다 - 백인덕


담장 밖에서 
밖으로만 그림자를 늘이는 나무는 안다. 
몇 차례 돌팔매쯤 거뜬히 견디는 
키 작은 관목조차 알고 있다. 
시간은 철갑(鐵甲)을 둘러주거나 석회질 외투로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아님을. 

밀어내는 힘과 
억누르는 세상이 만났을 때 
축축하고 질긴 외피로 자기 한계를 그을 때 

금은 이내 상처가 되고 
상처는 강이 되어 
모든 뜻밖의 저녁 아래로 흐를 뿐이란 걸 

시작은 언제나 벼락처럼 온다.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문학의전당 

 

 

 

 



뼈아픈 근황 - 백인덕 


서 있는 내내 
번갈아 저리는 다리 
두 눈 꼭 감고도 
추억 하나에 집중하지 못해 무작정 내린 
낯선 지명의 구도심 

지하에도 지상에도 즐비한 곡(哭)소리 
자진폐업, 임대문의, 점포정리, 핵폭탄세일의 
반투명 유리벽을 유람하는데 
순간 눈길을 확 당기는 
붉고 정갈한 서체 
-폭망, 
서서히 사라지기보다 불타버리는 게 낫다는 듯 
요절인 듯 
절명인 듯 
해 질 무렵 거리에 차가운 불을 뿜는다 

저린 다리를 잊고 
찬 불에 움츠러들어 
폐업 직전의 정신을 곰곰 헤집어본다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 
망각의 기술, 
예상 표절 

슬픈 눈빛으로 오가는 짐승들 사이 
딱딱한 목 뒤에서 기어이 틀어지는 
억센 뼈 하나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명이라고 하기엔 - 여태천  (0) 2021.02.04
한파주의보 - 전영관  (0) 2021.02.04
엄마는 그때 어디 있었어 - 피재현  (0) 2021.02.03
밥솥 - 이강산  (0) 2021.02.03
그 달빛 아득했느니 - 김재룡  (0) 2021.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