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운명이라고 하기엔 - 여태천

마루안 2021. 2. 4. 19:45

 

 

운명이라고 하기엔 - 여태천


두 사람은 모든 시간을
나란히 누워 있었다.
울고 있는 그녀를 보고
그는 웃었다.

두 발을 창가에 올려놓고
조용히 눈을 맞추었다.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그는 울었다.

두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면
서로의 얼굴을 보고
기도할 것을 맹세했다.

하얀 손이 때가 묻은
손을 잡았다.
떨리는 손을
젖은 손이 잡았다.

흔드리는 저녁 빛을
두 손이 오래 쥐고 있었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민음사

 

 

 



희망버스 - 여태천


망할 것처럼 폭설이 내리더니
오늘은 겨울비가 빈속을 후빈다.
주르륵
겨울비 오는 소리

툭 툭 투둑 투둑
겨울비 오는 소리
고장 난 장난감처럼 울고 있는
저 겨울을 읽을 수 없다.

세상은 허리처럼 아프고 애인같이 변덕스럽다.

'세상은 외롭고 쓸쓸해'*
오래된 라디오를 틀어놓고
어디서 누군가는 폐품 같은 몸뚱이에 주사를 꽂는다.
친구 없이 희망 없이
몹쓸 겨울을 견디고 있을 것이다.

울먹거리던 아이가 언제 들었는지
노랫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흥얼거린다.
'세상은 외롭고 쓸쓸해'
아이에게 겉옷을 입힌다.
춥지 마라!

세상은 외롭고 쓸쓸해서
망루 위에서도 한 사람은 또 한 사람을 사랑할 것이다.
매일매일 제 얼굴을 들여다보듯
위태롭게 한 사람의 내일을 읽으리라.

아파트 단지 옆 웅크리고 있는 낮은 지붕들
어느 날에는 햇빛이 저 지붕 위에서 빛날 것이다.
옥상에 널린 빨래들로
마음은 들뜨리라.

비가 내리는 겨울 캄캄한 아침에
버스를 기다리며
아이 옷의 단추를 채운다.


*김현식의 노래 <언제나 그대 내 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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