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때 어디 있었어 - 피재현
할머니가 나를 키워 줬어
두 주 전에 할머니를 잃은 한 사람이 말했다
나는 누가 키웠나
자두나무 아래 상자를 놓고 올라서
붉은 자두를 향해 손을 뻗을 때
할머니는 내 손을 때렸지 엄마는 집에 없었지
나는 누가 이렇게 늙도록 키웠나
언 강에, 강물에, 바람에
지독하게 맵던 바람이라니
할머니는 봄바람이 귀찮다며 그만 죽어 버렸지
열아홉의 나는
봄바람처럼 울면서 국밥을 날랐지만
문상 온 친구들은 절도 잘 할 줄 몰랐어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들에게
나는 눈물을 훔치고
내일이 발인이야 우린 선산이 있어
제법 상례를 아는 체했지만
할머니가 나를 키워 주었어, 라고 말하지 않았어
문어를 더 달라는 친구를 힐끗 보았어
경멸과 연민의 짝짝이 눈으로
도대체 나는 누가 키웠나
키운 사람이 없으니 키가 자라지 않았나
엄마
엄마는 그때 어디 있었어?
*시집/ 원더우먼 윤채선/ 걷는사람
밀당 - 피재현
오늘 내가 안 가면 엄마는 환장할 것이다
날 이런 데 버려 놓고 와 보지도 않는다고
나는 고만 죽을란다고 내 죽으면 다 편할 일이
수면제 탁 털어 넣고 죽어불란다고
온 병실 귀먹은 할망구한테도 다 들리게 소리칠 것이다
그럼 한 할망구가 나서서 여보소 김천댁,
아들도 먹고 살아야지 어예 맨날 들따보니껴
나랑 민화투나 한 판 하시더
하면서 엄마를 달랠 것이다
어떤 할망구는 고만 혼자 놀아도 되겠구만 또 저런다
지청구를 할 것이다 이런 참에 내가 나타나면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바쁜데 멀라꼬 왔노,
고만 가라, 가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허리며 다리며 아픈 곳을 주워섬기며
에구구구 죽는소리를 할 것이다
그럼 내가 바쁘다고 엄마 보러 안 오나? 하면서
짐짓 효자인 척 엄마 위세를 좀 세워 준 다음
어깨를 주무르며 내일부터는 내가 정말 바빠서
한 며칠 못 온다, 혼자 좀 있어라 하면
엄마는 또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외로 꼬고
괜찮다 일 봐라 돈 벌어야 먹고살지
일 봐라 할 것이다 나는 내일 저녁 무렵에나
몰래 와서 엄마가 뭐 하고 노시나 빼꼼히 들여다 봐야겠다
고만고만한 것 같으면 그냥 돌아가야겠다
엄마가 너무 시무룩하여 엄마 없는 아이처럼 가여우면
'짠' 하고 나타나 병실에 복숭아 통조림 한 통씩 돌리고
엄마 위세나 세워 줘야겠다
그러면 엄마는 또 달짝지근한 복숭아 향에 취해
한 며칠 덜 아프게 살아질 것이다
# 피재현 시인은 1967년 경북 안동 출생으로 1999년 계간 <사람의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우는 시간>, <원더우먼 윤채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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