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밥솥 - 이강산

마루안 2021. 2. 3. 19:12

 


밥솥 - 이강산


모옥(茅屋) 한 채,
넷째 아들로 입양한 토끼의 생일 선물이다

두 살배기 토끼의 등 따스운 아랫목이고 밥솥이다
밥맛 좋은 날엔 슬금슬금 몇 숟가락 더 퍼먹고 밥솥 중턱에 유리창을 낸다

-밥솥에 숟가락 대지 마라

어머니의 금기를 어긴
나의 일탈을 엿본 게 분명하다
숟가락 자국을 지우기 위해 밥을 흩어놓는 모양도 나를 빼박았다

토끼보다 먼저 입양한 동쪽 호수,
가뭄 끝에 가까스로 물밥 지어낸 호수의 밥솥을 들여다보자면
금복주 병이며 낡은 군화의 흉터가 선명하다

십중팔구 식탐 강한 막내가 어머니 몰래 퍼먹은 숟가락 자국일 터,

그러나 밥맛이 맛있다는 이유만으로 금기를 깨뜨릴 수 있다면
나는 세상의 모든 밥솥을 열어보고 싶지만

밥솥이 없는 경우, 예컨데
청량리 588의 유리창에 호수처럼 고여있는 철거 번호, 철거 번호 같은 여자들
한때 여자들의 밥솥이었을 종로46번길 무안여인숙,

이런 경우,
아예 숟가락도 없는 경우.....

토끼의 밥솥,
모옥 한 채 선물하고 싶다


*시집/ 하모니카를 찾아서/ 천년의시작

 

 

 

 

 


여지 - 이강산


세상의 문 굳게 잠가두었던 소사나무의 가지가 입춘 즈음에 스스로 두엇을 내쳤다

겨울 추위가 유난했다
가지의 상처 너머 바람이 보인다

곡우부터 상강까지 갖은 바람들이 소사의 잠긴 문 앞을 기웃거리다 돌아섰다

침묵으로,
더러는 나뭇잎의 머리채를 흔들며,

소사 홀로 무거워지다가 스스로 가지를 비웠는지 모른다
바람의 마음을 읽었다면 다행이겠지만,

소사와 더불어 늙은 유구의 선생 곁에서 나도 소사처럼 서너 차례 월동하였다
그새 생의 잔가지 두엇이 늘었다

-가지를 비우고 바람의 틈을 열어야 나무가 사는 거야
소사 같은 선생의 말씀이란
내 생의 가지를 비우고 바람을 모셔야 한다는 것,

내가 바람을 모시는 게 아니라
바람의 빈 가지 틈에서 내가 살아간다는 것,


 

 

# 이강산 시인은 1959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세상의 아름다운 풍경>, <물속의 발자국>, <모항母港>, <하모니카를 찾아서>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