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한파주의보 - 전영관

마루안 2021. 2. 4. 19:40

 

 

한파주의보 - 전영관


지금 3월을 생각한다는 것은
미리 달려가 권태라는 벌을 받는 일
등마다 서릿발 무늬를 짊어진 겨울의 유민이 되어
봄 제국 앞에 입국심사를 기다려야 한다

동창의 불행을 소문내는 척
애틋하게 혹한을 설명하는 기상 캐스터의 짧은 원피스에서
이물감이 올라온다

불 꺼진 난로라도
보는 순간 손부터 꺼내는 습관을 잊을 때쯤
3월이 스민다

혼음하듯 외투에 매달린 악취들에서
번다함을 느낀다 한쪽으로 닳은 뒤축에서
생계의 편벽(便辟)을 동정한다

지난 달력의 기념일들을 옮기다가
꽃 따위에 대한 기대도 없이 3월에서 멈췄다
그날들을 더이상 표기하지 않을 때
소멸을 생각한다

버스에 탑승한 이상 언젠가는 하차해야만 한다
쌓아놓았던 나이를 다 뜯어먹은 노인마냥
폐허를 경유한 사람은 수긍의 기술을 안다

노숙인의 저체온증 사망과 빙판 사고처럼
겨울은 패배나 착각에 대한 관용이 없다

텀블러의 무표정을 오후 내내 바라보았다


*시집/ 슬픔도 태도가 된다/ 문학동네

 

 

 

 

 

 

정전 - 전영관


우리의 안정감이란
불이 들어오고 있던 것들이 제자리에 있을 때
스치는 절망 같은 것

무람없이 서로에게 불행이라는 먹물을 끼얹다가
불이 들어오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안부를 묻는 생활에 익숙해지면
후일담에 대처하는 방법들을 알게 된다

훔쳐간 것도 없으면서
도둑고양이라는 누명을 쓴 것처럼
거리의 흔해빠진 애정은
이기적 착각의 부작용

어둠 속에서 네 어미가 희미하게 빛났다
어둠은 태어날 때마다 신선하다며
사랑과 이기심은 이복자매일 것이라고
보이지만 안 보이는 척했다
사람을 아는 척했다

형광등이 심약한 증인처럼 한 번 깜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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