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 피재현

마루안 2021. 3. 3. 21:59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 피재현


자주 부음이 와
가을과 겨울 사이 봄과 가을 사이는 늘 그래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죽고
거래처 사장의 장모가 죽기도 해

가끔씩 부음이 오면, 한 생애가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잠깐 궁금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스마트폰 보관함을 뒤져도
아버지 장례에 그들이 내 부의금을 확인하는 게 먼저야
그들의 조문을 기억하지 못하거든

장례 내내 나는 아버지가 미웠고 아버지가
불쌍했고 아버지가 슬펐거든

아직 겨울이 시작되지 않았어

유실수의 어깨에는 무거운 열매들이 얹혀 있고
아직 바람이 못 견디게 차지는 않아
사실 죽음이 그리 슬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솔직하게 말하는 게 어려울 뿐

선친의 죽음이 그저 그런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
사실은 그저 그런 일인데 우리도 그처럼 죽을 테고
난 좀 일찍 죽었으면 해
어느 따뜻한 날은 좀 오래 살고 싶기도 하지만
더 이상 쓸쓸함에 길들여지고 싶지 않아
그 쓸쓸함을 견딜 정도로 내가 뻔뻔해진다면
그건 가장 쓸쓸한 날이겠지

오늘은 두 죽음의 부음을 받았어
차례차례로 조문을 하고 한 곳에서는 점심밥을
다른 한 곳에서는 저녁밥을 먹고 술을 몇 잔 할까 해


*시집/ 원더우먼 윤채선/ 걷는사람

 

 

 

 

 


우화(羽化) - 피재현


엄마는 새로 태어나겠다는 듯 동그랗게 몸을 말고
벽 쪽으로 돌아누워 있었다
카운트를 시작한 벽시계와 먼저 죽은 사내의
사진과 담뱃진이 눌러붙은 꽃무늬 벽지가 있는 쪽으로

문은 허술했고 돌아누운 벽은 외풍이 숭숭했다
흉흉한 소문이 새어 나갈 것 같아 벽을 막아섰다


겨울은 끝나도 끝나지 않았고 봄은 꽃과 동의어가
아니었다
비닐봉지 밑바닥에 마지막 남은 한 개 꽈배기같이
말린 엄마의 몸에서 익어 가는 애벌레 냄새가 났다

엄마의 하얗게 센 뒷머리가 간신히 꽈배기에서
애벌레로 건져 올린 상상 연민의 우화(寓話)
지금 엄마는 잠실에 누워 애벌레의 시간을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첫울음을 터트리며 엄마가 태어나는 날까지
벽시계는 카운트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낡은 집의 바람벽은 더딘 바람을 쉼 없이 날라 올 것이다

 

 

 

*시인의 말

곁이라는 말의 곁에

내 곁에 엄마가
엄마 곁에 아부지가
있었다

우리는 나란히 누운 적은 없다

아부지가 죽고 엄마가 죽고

이 시집은 엄마의 무덤이다

엄마, 얼른 나를 용서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