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3890

새점을 치다 - 안채영

새점을 치다 - 안채영 길모퉁이를 구부려 그 위에 앉아 구부러진 모퉁이로 날아가지도 못하는 새를 데리고 새점을 치는 사람이 있다 모퉁이 저쪽에서 점괘가 적힌 종이가 뽑혀지고 뾰족한 부리만 있는 날개가 없는 단촐한 점괘(占卦) 운세를 두고 나온 여행이었다 드나드는 문에서 모든 날개를 뽑아버렸다 부리에 갇혀 날아가지 못하는 괘(卦)에 콕콕 쪼이는 날이다 운세에 붙들린 사람들 몇이 모퉁이처럼 구경하는 새의 불안한 적중 운세를 다 퍼먹어도 흔들리는 봄 날개가 뽑혀져나간 파닥거리는 괘 하나가 아직도 뜨거운 이마를 짚고 있다 허술한 주둥이에서 쫓겨나온 목록이 펴진다 뒤적거리는 표정으로 안부는 온다 오후 근처의 점통(占桶)에서 밀린 운세를 들고 나가는 특이 사항 없는, 누군가 나의 운세를 모자처럼 쓰고 모퉁이를 돌아..

한줄 詩 2021.04.01

4월의 부사(副詞) - 천수호

4월의 부사(副詞) - 천수호 겨울에도 은행나무는 저기 서 있었다 뜨거운 입김이 잎으로 맺히는 부끄럽지 않는 4월이 올 때까지 여전히 순결 정결이라는 첫 잎의 열렬함으로 그 겨울 맨살의 부끄러움을 감추기에는 아직 잎부채가 너무 작다 과연, 가장, 매우라는 부사가 겸손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 순백, 순수, 순정 이런 말놀이나 하면서 잎의 말을 열거하고 있다 4월이 더 분명해지는 이런 명사들은 신파였으므로 군데군데를 깁는 부사처럼 잎이 난 자리마다 봉합 흔적이 있다 4월의 감탄사는 어디로 발송하려는지 가지 끝 허공 한 자락에 은행잎 우표를 붙였다 뗐다 한다 열렬과 비열을 차례로 헤아리며 이파리 점괘를 짚는 것도 겨울나무에서 봄나무로 건너오는 신파의 방식이다 이 나무의 문장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될 부사 ..

한줄 詩 2021.04.01

지상의 감옥 - 여태천

지상의 감옥 - 여태천 공기가 달라졌다며 사람들이 투덜대기 시작했다. 하얀 마스크의 사람이 뿌연 길 저편으로 부리나케 뛰어간다. 며칠 전 한 사람은 옥상으로 전광판으로 타워크레인 위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듯이 그래야 숨을 쉴 수 있다는 듯이 땅을 벗어나 하늘로 올라갔다. 아무도 안 보는 가난한 하늘 무지개는 뜨지 않았다. 뜨거운 여름 양철지붕을 식혀 줄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격앙하지도 울부짖지도 않는다. 부산하게 걸어가는 사람들 어색한 몸짓으로 서로를 흉내를 낸다. 때가 되면 불이 켜졌다 다시 꺼졌다 반복되는 풍경들 속으로 똑같은 모양의 얼굴들이 보인다. 여긴 마치 감옥 같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나같이 외롭다는 표정이다. *시집/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

한줄 詩 2021.03.31

맹세 - 김옥종

맹세 - 김옥종 아즉 애 늙은이는 길을 따라 나서지 못해 갈매기 울음소리로 네가 등진 이승의 서쪽 하늘에 대못 박아 흘린 매화꽃 노을에, 한참을 뒹굴다가 술은 일찍 동이 나고 눈물샘은 닳아져 버렸으니 뉘 있어 너와 함께 인어바위 건너 삼학도로 돌아갈 것이냐 구 터미널 미로스낵 한 켠에 마주앉아 소주병에 맥소롱 타 마시다가 밥태기꽃 흐드러지는 사월에 덤장 들춰 잡아온 보리숭어 건정 찌고 갑오징어 데쳐서 소풍가고 싶은 날 맞닿은 살 향기로도 부족해 남의 살 한 점 물어뜯고 싶어 데쳐낸 정소와 복어 쑥국에 통음 하다가 햐얀 꽃비 내리는 비탈길에서 브레이크 없는 생 앞에 게워 내었다 다시는 왔던 길을 취기 없이 돌아가지 않으련다 다시는, 엎어졌던 꽃길 위에서 일어나지 않으련다 *시집/ 민어의 노래/ 휴먼앤북스 ..

한줄 詩 2021.03.31

달을 뽑았다 - 정선희

달을 뽑았다 - 정선희 타로카드를 뒤집는다 생각이 많아서 달이 되었군요 길들여진 늑대와 길들지 않은 개가 달을 향해 짖고 있다 달빛에 이끌려 가재 한 마리 물 밖으로 나오고 있다 오늘은 초승달이 되었다가 내일은 보름달이 되었다가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잠이 오지 않아요 어떻게 없던 일이 될 수 있나요 이미 두 손이 피투성인데 끄덕임과 악수 사이를 오가며 충혈과 소름의 차이를 이해한다 내 머릿속에 뜬 달이 자라는 속도로 시소가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기운다 패를 뒤집는다 퀭한 눈동자가 달처럼 어둠 속에 박혀있다 나는 지금 하현으로 기우는 중이다 *시집/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 상상인 저, 붓다 - 정선희 자는 건가 죽은 건가 가까이 가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있다 표정이 뻥 뚫린 사람, 고개를 절레절..

한줄 詩 2021.03.31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 김대호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 김대호 나이를 먹으면서 체중이 늘었다 그리고 그래서 그러나 딱딱하게 내 몸을 구성하던 물질들은 치아를 시작으로 깨지고 연화되었다 까칠했던 성격은 유연성하고는 상관없이 말랑해졌다 모든 것이 작은 알갱이로 퇴화하면서 내 몸은 모래언덕을 가진 하나의 사막이 되었다 무릎에도 바람이 들고 풍이 오려는지 한쪽이 자주 마비되었다 모래언덕에는 매일 바람이 불어 언덕의 지형이 매일 바뀌었다 그러면서 언뜻언뜻 모래언덕의 깊은 지층에 묻혀 있는 유물이 보이는 듯도 했다 그것은 꿈결에서나 잠시 보이던 내 근친들이었다 내 몸 안에 거처했지만 한 번도 만날 수 없었던 근친 내 유물들이여 딱딱하고 까칠한 조직에 걸려 깊은 지층에서 내 불쌍한 야망과 동선을 걱정했을 내 근친 내 유물들이여 난 요즘 감정과 기..

한줄 詩 2021.03.30

삼팔광땡 - 박윤우

삼팔광땡 - 박윤우 이제 달만 뜨면 되겠다 꽃패 한번 잡아 보겠다고 엉덩이 밑에 숨긴 3월 벚꽃 한 장, 방석 밑에서 만개해 있다 이승이 죽어야 나가는 판이라면 여기는 털려야 나가는 판이겠다 너무 오래 깔고 앉으면 꽃물 들 텐데, 만월 공산은 어느 산등성이에 홀패로 서 있나? 음복주가 몇 순배나 돌고 있는데 달은 지랄맞게 뜨지 않고 깔고 앉은 3월 벚꽃은 염치없이 애만 끓인다 한사코 달 없이 끝나는 파장 장례식장 계단을 나서니 어라! 하늘은 둥두렷한 만월 차지고 땅은 3월 벚꽃 흐드러진 꽃비 차지다 바야흐로 이승이 삼팔광땡이다 *시집/ 저 달, 발꿈치가 없다/ 시와반시 공터 - 박윤우 들어온 골목이 나가는 골목을 찾느라 두리번거린다 안 닿는 데를 긁으려고 억지로 팔을 꺾으면 거기, 공터를 견디는 공터가 ..

한줄 詩 2021.03.30

그녀가 사는 법 - 김선향

그녀가 사는 법 - 김선향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아주 오래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거대한 악어 한 마리 방을 독차지한 그랜드피아노 그녀는 싱크대 앞에 요를 깔고 모로 눕는다 애인의 뺨을 어루만지듯 피아노를 보며 어렴풋이 웃는다 그녀가 유일하게 웃는 때 피붙이 대신 피아노 고양이 대신 피아노 피아노는 그녀의 마지막 허영 끼니를 거르더라도 내다 팔 수는 없지 손가락을 빨면 그뿐 피가 마르고 뼈가 녹아도 피아노는 안식 피아노는 구원 그녀를 피아노에 묶어 난바다로 떠밀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그녀는 곧 눈을 감겠지 *시집/ F등급 영화/ 삶창 구체관절인형 - 김선향 아이가 운다 사금파리처럼 텔레비전 빛이 새어 나오는 어두운 방에서 홀로 친구들은 다 갖고 있는 구체관절인형이 자기만 없다고 운다 야, 이년아 그 돈이..

한줄 詩 2021.03.30

발라드의 끝 - 황동규

발라드의 끝 - 황동규 개나리 필 무렵 성했던 눈마저 황반변성 안구주사 맞기 시작했다. 앞으론 확대경 없이 신문 읽을 생각 말게! 안됐다는 듯 서달산이 아지랑이 피워 올리고 노랗고 하얗고 빨간 꽃들을 꾸역꾸역 뱉어낸다. 아지랑이 자욱이 오르는 오솔길이 한때 마음 되게 빼앗겼던 발라드 같다. 가만, 생각해보면 지난 삶의 반절은 괜히 바쁘게 살았다. 우연히 들어보니 가뿐한 호박. 나머지 반도 볼 것 못 볼 것 미리 가리지 않고 제대로 살았던가? 봄이 몸살 톡톡히 앓고 있는 곳, 오솔길 구비를 돌자 눈이 밝아진다. 아지랑이 속에서 하양 노랑 나비들이 화들짝 날아오른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세필(細筆) 춤사위들이 시각(視覺)을 춤추게 한다. 눈높이가 여직 이토록 눈부실 줄이야! 발라드는 끝머리에서 삶을 가볍게 ..

한줄 詩 2021.03.29

슬프게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 신표균

슬프게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 신표균 사춘기를 앓기에는 봄날의 보폭이 너무 짧아 삼월이 종종걸음 친 다음에야 깨우쳤습니다 자목련 큰언니 부풀어 오른 암꽃이삭 버들강아지 칭얼대는 옹알이 듣고서야 브래지어 뽕 터진다는 것 삼월이 꼬리 감추려 할 즈음에야 눈치챘습니다 매화 개나리 산수유 진달래 봄꽃 네 자매 홍역 같기도 하고 황달 같기도 한 젖몸살 돌림병 앓는 줄 삼월이 그림자 거둘 무렵에야 깨달았습니다 겨울 궁전에서 동상 견딘 얼음 공주 언 손 봄볕 쬘 사이도 없이 자매들 초경 앓는 신음 견디다 못해 알몸 분신공양, 봄을 익히고 있습니다 어린 처녀 연달래 시집갈 나이 진달래 혼기 놓친 난달래 무덤가 맴돌다 미쳐버린 금달래 슬피 피었다가 아프게 지는 진달래 그렇게 참꽃이 되었습니다 *시집/ 일곱 번씩 일곱 ..

한줄 詩 2021.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