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지난번처럼 - 이산하

마루안 2021. 3. 7. 19:16

 

 

지난번처럼 - 이산하


제주도 예맨 난민문제로 강자의 숨은 발톱이 드러나고
약자를 추방시키는 국민청원에 수십만 명이 달려들 때
난 동유럽의 나치 강제수용소들을 성지순례 중이었다.
어느날 독일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를 찾아 헤매다가
중앙광장 근처 거의 텅 빈 마트의 진열장이 눈에 띄었다.
마트 유리문에 붙은 독일어 공고문을 친구가 번역해주었다.

친애하는 고객 여러분
어제 갑자기 갓난아기와 어린애들이 포함된
200여 명의 난민을 실은 버스들이 도착했습니다.
저희들은 난민들을 돕기 위해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매장의 모든 식료품들을
구호품으로 보냈습니다.
너무나 긴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새로운 물품들은 이미 주문해놓았으며
거듭 양해를 바랍니다.
지난번처럼 고객 여러분의 마음을 믿습니다.


*시집/ 악의 평범성/ 창비

 

 

 

 

 

 

악의 평범성 - 이산하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 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글
알도 꽉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는 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 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보는
송강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시인의 말

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여 년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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